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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떠난 지 10년 … 다시 만나는 정운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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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시선
정운영 지음, 생각의힘
336쪽, 1만5000원

짧은 삶과 긴 여운. 2005년 9월 정운영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61세로 별세했을 때 누군가 이렇게 추도했었다. “그는 떠났으나… 그를 따르는 수많은 후배와 후학들의 머리와 마음 속에 여전히 살아있다”고. 이 말은 맞았다. 그가 떠난 지 올해로 10년.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를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의 글을 묶어 선집 『시선』을 출간했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이 책의 서문에서 “세상은 산 사람들의 것이고 죽은 사람은 금세금세 잊히게 마련인데 정(운영)형은 10년이 지났는데도 사회적으로 기억되고 있(다)”고 썼다.

 왜 정운영 선생은 이처럼 긴 여운을 가질까. 무엇보다 학자다운 학자였기 때문이지 싶다. 그는 경제학자다. 벨기에에서 박사를 받은 후 1982년 귀국해 대학 강단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보급한 주역이다. 하지만 수식어야 어떻든 학자는 학자다워야 하는 법. 정운영 선생은 대선판이 벌어지면 학자들이 몽땅 정치판으로 증발되는 오늘날 학계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명칼럼니스트에 유명 TV토론프로그램 사회자였던 그에게 왜 정치판의 유혹이 없었을까. 필자가 보고 들은 것만도 여럿이다. 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가짜가 아닌, ‘진짜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줄곧 역설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글로서의 응원이었지 현실 정치 참여는 아니었다.

냉철한 경제학자이자 따뜻한 칼럼니스트였던 고(故) 정운영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앙포토]

 두 번째는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가슴 속에 늘 새기고 있던 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진보’가 그런 표현 중 하나다. 칼럼에서 약자를 변호하고 강자를 질타한 이유다. 감원 선풍에 가슴 졸이는 가장의 처지를 위로했고(162~164쪽) 마녀사냥의 희생자로 몰린 소설 『태백산맥』을 옹호했다(322~324쪽). 늦게 가는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세계화, 패권 국가의 이중 잣대(116~119쪽), 386세대의 포퓰리즘적 정치행태(212~215쪽)도 통렬하게 비판했다. 남북문제는 쌀 몇 섬과 돈 몇 푼을 따질 일이 아니라며, 이산가족 상봉조차 못하는 양쪽 지도자들의 옹졸함을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179~189쪽).

 그뿐 아니다. 동서고금을 오르내리는 지식의 무게,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그의 펜을 거치면 장삼이사도 이해할 수 있는 글로 변하는 필력 등은 또 다른 이유다. 신영복 선생이 쓴 추천사가 단적인 증거다. “때로는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을 생환하며, 때로는 고고한 철학적 사유의 세계로 비상하며, 때로는 정치경제의 집요한 욕망을 과녁으로 삼아”.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단언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참으로 긴 여운이 독자의 머리와 가슴 속을 맴돌 거다. 그의 짧은 생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김영욱 금융연구원 상근자문위원

[S BOX] ‘잔인한 잉태의 역설, 봄의 비밀’ 감성과 이성의 문장

“추석은 귀향이다. 그러나 그 귀향이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고기는 옛 못을 생각한다’는 도잠의 감상으로 흘러서는 안된다.”(137쪽).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나 저널리스트가 썼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2000년 한국의 명문(名文)으로 선정된 글이다. 책 곳곳에 이같은 감성과 유려한 문장이 배어있다. 봄에는 “자유를 위한 비상과 혁명의 고독을 차마 시인의 노래로만 끝낼 것인가? 화려한 축제에 가린, 잔인한 잉태의 역설, 그것이야말로 봄이 간직한 비밀”(266쪽), 가을에는 “굳이 알프스 산자락의 티롤 역참이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인생은 유리빛 황혼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인 것을”(327쪽)이라고 읊었다.

 그의 본업은 경제학이다. 이런 감성과 문장력은 그가 어려운 경제학을 쉽게 설명하는 동력이 됐다. 정운영 선생의 감성과 문재(文才)를 느껴보는 것, 일독을 권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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