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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중이온가속기…"자체 제작한 초전도 가속관, 세계 최고성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4일(현지 시간) 캐나다 휘슬러에서 열린 국제 초전도고주파(SRF) 학회에서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의 전동오 박사 국내기술로 자체 설계·제작한 초전도 가속관의 성능 테스트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2021년 완공 예정인 IBS 중이온가속기 조감도.

2021년 완공을 목표로 대전 과학비즈니스벨트에 구축 중인 중이온가속기에 세계 과학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국내기술로 자체 설계ㆍ제작한 초전도 가속관이 잇따라 세계 최고수준의 성능을 공인받은 덕이다.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의 전동오 박사는 지난 14일(현지시간) 캐나다 휘슬러에서 열린 세계 초전도고주파(SRF) 학회에서 “HWR(Half Wave Resonators) 타입 초전도 가속관을 만들어 캐나다 국립입자핵물리연구소(TRIUMF)에 테스트를 맡긴 결과 설계치 대비 200% 성능을 보였다”고 밝혔다.

가속기는 강력한 전기장을 이용해 입자를 광속(초당약 30만㎞)에 가깝게 가속하는 장비다. 입자 종류에 따라 방사광(전자)ㆍ양성자ㆍ중이온 가속기 등으로 분류된다. 양성자는 수소 원자에서 전자를 떼어낸 이온, 중이온은 탄소ㆍ우라늄 등 수소보다 무거운 원소의 이온을 가리킨다.

입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키면 태양보다 훨씬 밝은 빛을 내거나(방사광 가속기)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다(양성자ㆍ중이온 가속기). 역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다섯 명 중 한 명은 가속기로 연구를 했을 만큼 현대 기초 과학연구의 핵심 장비로 꼽힌다. 산업용 동위원소를 만들거나 암 치료에 쓰이는 등 실용적 가치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초전도 가속관은 이 같은 가속기에 쓰이는 진공관으로 절대 온도 0도(영하 273.15℃)에서 전기저항이 ‘0’이 되는 초전도 현상을 일으킨다. 가속관을 초전도로 만들면 입자를 쉽게 가속할 수 있어 가속기의 길이가 짧아진다. 그만큼 건설비용이 줄어든다. 일반 가속관은 투입되는 전기 에너지의 50% 이상이 열로 버려지는 반면, 초전도 가속관은 이런 ‘낭비’가 없어 운용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IBS의 중이온가속기에는 HWR과 QWR(Quarter Wave Resonators), SSR(Single Spoke Resonators)1, SSR2 등 총 4종류의 초전도 가속관이 쓰인다. 각각 가속관 안에서 입자를 미는 전기장의 세기가 35MV/m로 설계됐는데, 이중 HWR을 실제 제작해보니 목표의 2배(70MV/m) 성능을 보였다는 것이다. 가속관의 전기장이 세면 그만큼 가속 속도(에너지)가 높아진다.

앞서 IBS는 지난 3월 또 다른 가속관인 QWR이 설계치 대비 160%(56MV/m)의 성능을 보여 “세계 8번째로 초전도 가속관 제작 기술 확보에 성공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전까지 초전도 가속관 제작 기술을 가진 나라는 미국ㆍ캐나다ㆍ독일ㆍ일본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중국 뿐이었다. HWR과 QWR은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이 설계하고 국내 기업(비츠로테크)가 제작을 담당했다.

SRF 학회 참가자들은 이 같은 한국의 ‘약진’에 큰 관심을 보였다. 중이온가속기를 처음 만드는 후발 국가가 자체 설계ㆍ제작한 초전도 가속관이 이처럼 빼어난 성능을 보인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 가속관의 성능 테스트를 담당한 캐나다의 TRIUM도 처음 가속관을 만들 땐 외국에 제작을 맡겼다. IBS 전동오 박사의 발표가 끝난 뒤 한 프랑스 학자는 “한국 업체의 제작 기술이 정말 그렇게 높냐”고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전 박사는 “초전도 분야에서 국제적 인지도가 거의 없던 한국이 가속관 자체 제작을 계기로 확실한 ‘초전도 클럽’ 멤버로 인정을 받게 됐다. 가속기를 완공하고 나면 그냥 멤버가 아니라 ‘골드 멤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높아진 국제 인지도를 바탕으로 IBS는 2017년 SRF 학회 개최를 놓고 미국 희귀동위원소빔시설(FRIB), 일본 고에너지가속기연구기구(KEK), 중국 근대물리연구소(IMP) 등 세계적 가속기 연구소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SRF는 초전도 기술이 차세대 가속기의 핵심 기술로 떠오르면서 국제적 위상이 급격히 높아진 학회다. 세계 각국을 돌며 격년으로 열리는 학회를 유치하기 위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하다. 18일 발표된 최종 심사결과 중국이 차기 개최지로 결정되긴 했지만 한국이 막판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IBS 중이온가속기에 쓰일 HWP 초전도 가속관. 설계치 대비 200%의 성능을 보였다.

◇최고사양의 가속기=IBS 중이온가속기는 양성자부터 우라늄까지 다양한 입자를 가속할 수 있는 장비다. 입자를 계속 회전시켜 가속을 할 수 있는 원형가속기에 비해 가속 에너지는 낮지만(200MeV/u), 출력은 동급 최고수준(400㎾)이다. 가속 출력이 높다는 것은 만드는 입자 다발(빔)이 강하다는 의미다. 빔이 강하면 다른 물질을 때릴 때 입자 충돌 횟수가 많아진다. 출력이 낮은 가속기에 비해 단 시간 내에 원하는 실험결과를 얻을 수 있고, 그 만큼 실험 효율이 높다. 2021년 중이온가속기가 완공되면 이런 강력한 빔을 이용해 펨토미터(㎙=1000조 분의 1m) 크기의 미시 세계를 연구할 수 있다. 특정 물질의 구조를 바꿔 산업적으로 가치가 높은 희귀 동위원소도 많이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런 가속 에너지ㆍ출력을 갖는 외국 가속기는 미국이 미시간대에 짓고 있는 희귀동위원소빔시설(FRIB)뿐이다. FRIB은 한국 가속기보다 한 해 늦은 2022년 완공 예정이다. 하지만 미국은 풍부한 가속기 구축ㆍ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FRIB의 사이토 겐지 박사는 14일 SRF 발표를 통해 “2013년 건물 공사, 지난해 여름 가속기 제작을 시작했다”며 건물 공사 등이 상당부분 끝난 부지 사진을 공개했다. 학계에선 “FRIB이 완공을 최대한 앞당기려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FRIB 프로젝트가 2000년대 초반 시작된 반면, 한국은 2011년 12월 사업단장이 선임된 뒤에야 본격적으로 가속기 구축을 시작했다. 벌써 건물을 올린 FRIB과 달리 이제 겨우 터 닦기를 하고 있다. 가속기를 구축해본 경험을 가진 전문인력도 부족하다. 대형 가속기의 설계-제작-완공 전 과정을 다 경험해 본 사람은 IBS 내에 전동오 박사뿐이다. 미국 국립오크리지연구소에서 세계 최고의 중성자빔을 만드는 선형 양성자가속기(SNS)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외 다른 외국 가속기 연구소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사람을 다 합해도 채 10명이 안 된다. 전 박사는 “사실상 맨땅에서 출발해 가속기를 만들고 있는 셈”이라며 “FRIB과 상당히 터프한(힘든) 경쟁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출발도 늦고 경험도 부족하지만 한국이 미국보다 앞선 점도 있다. 독창적인 가속기 디자인이다. 중이온 가속기로 동위원소를 만드는 방식은 두 가지다. 두꺼운 표적에 양성자를 충돌시켜 대전류 저에너지의 동위원소 빔을 만드는 ISOL(Isotope Separation On-Line)과 얇은 표적에 중이온을 충돌시켜 소전류 고에너지 동위원소 빔을 만드는 IF(In-flight Fragmentation) 방식이다. 세계 각국의 가속기들은 모두 이 둘 중 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FRIB도 IF 방식으로 짓고 있다.

반면 한국은 세계 최초로 두 방식을 결합해 가속기를 설계했다. 먼저 ISOL로 동위원소를 만든 뒤 이를 재가속해 IF로 재차 동위원소를 만드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한 방식만을 사용해 만들 수 없었던 특수한 원소까지 만들 수 있다. FRIB도 2차 확장 땐 ISOL 방식을 추가할 계획을 갖고 있다.

휘슬러(캐나다)=글ㆍ사진 김한별 기자 kim.hanby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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