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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일본 기행] 4. 장기불황에 '마음의 病' 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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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2일 오전 11시쯤 도쿄(東京)부근 지바(千葉)시의 장애인직업종합센터. 1층의 교육실에 30~50대 남성 네명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이들은 다소 멍한 표정으로 신문을 읽거나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았다.

책상 옆 게시판에 붙어 있는 '인사는 하루의 시작'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 직업센터지원과의 모리 세이치(森誠一) 과장보좌는 "우울증으로 휴직하고 6개월간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며 "대화.신문읽기 등을 통해 심리적인 안정을 찾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직장 경력 33년째인 50대 초반의 A씨는 줄곧 경리업무를 맡아왔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 직장에서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불안감이 커지면서 불면증.우울증에 심하게 시달렸다. 알코올중독 증세까지 겹쳐 두차례 휴직한 끝에 이곳을 찾게 됐다.

1994년부터 전국 47개 장애자 직업종합센터에 정신분열증 치료 프로그램이 생겼다. 버블 붕괴 직후 주가.부동산 폭락으로 충격받아 정신분열증을 겪는 사람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 우울증'도 크게 늘었다. 그래서 우울증 .기분장애협회가 생겼다. 직업센터지원과의 다카세 겐이치(高瀨健一)계장은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말했다. 웬만한 사람은 모두 앓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상황은 '감기' 정도가 아니다.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자가 91년에는 2만1천여명이었다. 그러나 98년부터 매년 3만명을 넘고 있다. 자살 이유로는 경제문제가 절반 이상이다.

자살 유혹에 빠지는 사람도 갈수록 늘고 있다. 후생노동성 산하 노동복지사업단은 2000년부터 전국 19개 산재병원에서 '마음의 전화상담'을 24시간 실시하고 있다.

이 사업단의 신도 게이고(進藤慶吾)근로자의료추진과 주사는 "편한 마음으로 쌓인 감정을 털어놓을 기회를 제공해 자살자를 줄이자는 게 사업단을 만든 취지"라고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상담자는 8천2백여명으로 전년보다 53%나 늘었고, 특히 자살상담(3백87건)은 1백50%나 증가했다. 상담자의 60%가 30~40대이고, 이유는 '불안감.불안정.불면증'이 82%였다.

도쿄대 겐다 유지(玄田有史.노동경제)교수는 "구조조정으로 살아남은 사람도 업무 증가로 너무 바빠지자 남을 친절하게 대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과로로 쓰러지는 사람도 많아져 지난해 정부의 과로재해 인정 건수가 전년의 2.2배인 3백17건(사망 1백60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60여명의 변호사로 구성돼 무료 상담을 하고 있는 '과로사 변호단 전국연락회의'의 간사인 가와히토 히로시(川人博)변호사는 "일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연간 1만명 가까이 되는데 극소수만 산업재해로 인정한다"고 주장했다.

직장인들을 더욱 피곤하게 하는 것은 '서비스 잔업'(수당을 받지 않고 하는 잔업)이다. 서비스잔업 상담 변호인단의 오가와 히데오(小川英郞)변호사는 "상담건수가 5~6년 전에는 한주 1~2건이었지만 지금은 40건 정도"라며 "너무 심한 경우 재판을 하자고 하면 대부분은 '그러면 잘린다'며 전화를 끊는다"고 말했다.

친절문화가 흔들리며 사회가 거칠어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도쿄 인근 지방의 열차 안에서 오전 9시쯤 50대 남성이 휴대전화로 통화하던 30대 여성을 "시끄럽다"며 머리를 때려 두 사람이 치고 받고 싸우는 통에 열차가 15분간 정지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도쿄대 요시미 슌야(吉見俊哉.사회정보)교수는 "90년대 이후 불확실한 사회가 되면서 자신감.방향감각을 잃고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아진데다 공동의식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동학대 문제도 악화됐다. 전국 아동상담소의 아동학대 상담처리 건수가 91년 1천1백여건에서 2001년에는 21배(2만3천여건)로 급증했다. '아동학대 방지법'이 제정된 2000년11월부터 1년7개월 동안 62명의 어린이(3세 미만이 70%)가 부모의 학대로 숨졌다.

도쿄대 후카가와 유키코(深川由起子.교양학)교수는 "과거에는 참고 넘어가던 것들이 이제는 곧바로 터져나오고, 자녀에게 화풀이가 돌아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경제.시사 평론가인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는 "일본이 남을 탓하는 사회가 됐다"고 말했다. 많은 교수도 "과거에는 학생들이 '내 탓'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저 친구 탓'이라고 한다"며 동의한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도쿄도지사는 요즘 범죄를 줄인다는 명목 아래 외국인 단속에 한창이다. 게이오대 가네코 마사루(金子勝.경제)교수는 그러나 "버블 붕괴 후 중국의 값싼 노동력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동남아시아 근로자들을 많이 데려왔는데, 최근 일본 내에 범죄가 증가하자 외국인 탓으로 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가쿠게이대 야마다 마사히로(山田昌弘.교육)교수는 "범죄 급증도 문제지만 내가 불행하니까 남도 그렇게 만들겠다는 범죄가 많아져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2001년에는 오사카(大阪)의 한 초등학교에 침입한 남성이 흉기로 학생 8명을 살해한 후 "애들이 잘 사는 것 같아 샘이 났다"고 말해 일본사회를 놀라게 했다.

일확천금을 꿈꾸거나 현실 도피를 하려는 사람도 늘고 있다. 니혼덴쇼도(日本天翔堂)가 통신판매하는 카드 모양의 2만8천엔(약 28만원)짜리 금부적은 주문자의 띠.생년월일에 맞춰 주문생산하고 고객의 이름을 새긴다.

이름에 기(氣)를 넣어주면 막힌 것이 뚫려 운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이 회사 홍보담당 사이토(齊藤.여)씨는 "이런 상품이 1백종 이상인데 버블 붕괴 후 꾸준히 잘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대 모리 다테시 (森建資.노동경제)교수는 "90년대 들어 포스트 모더니즘이 유행하고 사회를 이끌어온 고급문화가 사라지면서 사회가 중심을 못 잡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오대영.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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