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숨어 사는 아이 2만5000명 … 인권 차원에서 품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국가인권위원회는 한국에 사는 무국적 아이를 2만여 명으로 추산한다. 부모가 불법 체류자라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도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한 아이다. 함께 입국한 부모가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되면서 이런 서비스의 사각지대에서 지내는 외국 국적 아이도 5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출생 신고는 물론 의료·보육·교육 등 아동·청소년으로서 기본적인 사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2만5000명이나 되는 아동·청소년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어린이집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며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은 1991년 12월 ‘아동의 권리에 대한 협약’에 비준하면서 부모의 출신과 상관없이 모든 아동(만 18세 미만의 사람)의 출생 신고와 필요한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등을 보장한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엔의 아동권리위원회(CRC)는 2011년 한국 정부에 이를 제대로 지켜달라고 권고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를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물론 이들을 법과 제도적으로 받아들이려면 법 개정과 사회적 합의 등 일정한 절차와 과정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을 껴안는 것이 인간의 기본권 보장과 직결되는 사안이라는 점이다. 숨어 사는 이들을 이렇게 사각지대에서 방치하는 것은 일종의 인권침해일 수 있다. 정부는 법과 제도를 개선해 이들에게 의료·보육·교육 등 기본권을 보장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품격을 높이고 우리 사회의 건전성·도덕성을 확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의 개선과 더불어 이들에게 절실한 것이 주변과의 인간적인 교류다. 아동·청소년이 제대로 인성을 갖추면서 성장하려면 또래나 이웃과의 교류·교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처럼 부모에 대한 불법 체류자 단속이 두려워 골방에서 컴퓨터나 텔레비전에 빠져 숨어 지낸다면 자칫 사회 부적응자가 양산될 우려가 있다. 이들이 더 이상 외톨이로 방치되면서 이웃도 미래도 없는 절망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지역사회와 시민사회, 학교가 나서야 한다.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해 이들에게는 한국의 정을 제대로 보여주고, 지역 주민이나 학생들에게는 다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여줄 필요가 있다.

 임신·출산·보육 등 모자보건 문제도 간과해선 안 된다. 불법 체류자라는 이유로 임산부가 검진이나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이들이 출산한 영·유아가 영양·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신분과 상관없이 한국에 머무는 임산부는 제대로 된 보건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임산부 배려는 인권 문제를 넘어 인간적인 도리가 아닌가.

 한국에서 자라는 외국인 자녀는 글로벌 자산이 될 수 있다. 이들이 장차 한국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지금은 우리 사회가 이들의 권리 보장에 앞장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