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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단순하고 아늑한, 그래서 특별한…흑백사진의 귀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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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 한 장 정성들여 찍고 현상해
사람 손길 어린 따뜻한 감성이 매력
웨딩 촬영 등 기념 사진으로도 재조명

흑백이 주는 생경함과 희귀성
20·30대에겐 새롭고 재밌게 느껴져
흑백사진전 사람 몰리고 SNS 자랑도

다음 달 결혼식을 올리는 예비부부, 두 살 딸의 모습을 그대로 남겨주고 싶은 부부, 이젠 모두 할아버지·할머니가 돼 한자리에 모인 9남매 …. 먼지 가득한 오래된 앨범에 꽂혀있는 사진처럼 보이시나요? 아닙니다. 모두 올해 새로 찍은 사진들입니다. 흑백필름으로 찍어 암실에서 현상했습니다. 디지털카메라와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동네 사진관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최근 특별한 날을 흑백사진으로 기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색깔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세상에서 이들은 왜 흑백사진을 찾을까요.

보정도 색깔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 담는다

쓸쓸해 보이지만, 한없이 따뜻하다.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시리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를 위로를 건넨다. 오래전 앨범에서 본 듯 익숙하기도, 눈으로 보는 현실 세상과는 달라 새롭기도 하다. 흑백사진. 흑과 백으로만 피사체를 표현하는 흑백사진은 그렇게 오래된 앨범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디지털 시대. SNS와 인터넷에는 하루 수백만, 수천만 장의 사진이 올라온다. 이제 사진은 너무 흔하고 화려하다. 그런데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 흑백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흑백사진은 ‘위로’다

“흑백사진 속 저 자신의 모습을 보는데 힘들었던 그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더라고요. 마치 저만 아는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죠. 그것만으로 위로가 됐어요.”

사진 찍기를 싫어하던 직장인 강예랑(29)씨가 흑백필름 사진에 빠진 이유다. 4년 전 우연히 발견한 흑백사진관에서 촬영한 사진 한 장이 그의 마음을 울렸다. 백 마디 말보다 사진 한 장이 지닌 힘을 깨달았다. 이후 매년 12월 생일을 전후해 꼭 사진관을 찾아 흑백사진을 찍는다. 흑백사진 전문 스튜디오 ‘물나무’를 운영하는 김현식(45) 작가는 흑백사진을 ‘엄마가 양은 냄비에 지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으로 표현했다. 기계에 의해 현상하는 디지털 사진보다 작가가 원하는 대로 톤을 조절하고 사진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흑백사진이 위로가 되는 건 1000만원짜리 밥솥에 지은 밥보다 엄마가 자식을 위해 정성 들여 지은 밥 한 그릇이 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흑백사진이 사람을 위로하는 건 아날로그 감성 때문이다. 디지털에서는 절대 만들어 낼 수 없는 게 아날로그에 있다. 바로 ‘사람의 힘’이다. 갈수록 빠르고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와는 다른 과거의 편안하고 따뜻하며 평온한 정서가 담겨 있다. 이 따뜻함이 현실에 지친 사람을 위로한다. 흑백필름 사진은 메모리 카드가 아닌 필름을 사용한다. 컴퓨터 앞 대신 깜깜한 암실에서 일일이 약품 처리를 하며 옛날 기법대로 사진을 현상한다. 필름으로 촬영하는 흑백사진은 디지털 사진보다 촬영하는 사람의 정성이 많이 필요하다. 그만큼 사람 냄새가 난다. 디지털카메라는 촬영 직후 바로 확인할 수 있지만 필름 카메라는 현상할 때까지 사진을 확인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사진을 촬영할 때부터 한 장 한 장 정성을 들여야 한다. 시작부터 다른 셈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간은 옛날부터 다른 사람과 부딪히며 살아왔기 때문에 기계보다 사람을 선호한다. 아날로그적인 정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최근 디지털 시대를 역행이라도 하듯 컬러링북·손글씨·종이접기 같은 아날로그 취미활동이 인기인 것도 같은 이유다.

조용훈(40·오른쪽)씨와 아내 홍지영(37)씨가 아들 규원(1)군 돌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사진을 찍고 있는 건 흑백사진 전용 사진관 ‘물나무 스튜디오’의 김현식 작가다. 조씨 부부는 규원군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매년 생일에 흑백사진을 찍을 예정이다. “흔하지 않은 흑백사진으로 가족의 특별한 날을 기념하고 싶다”는 게 조씨 부부의 말이다.

흑백사진은 ‘자연’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남기고 싶었어요. 뾰루지가 난 얼굴이나 살찐 모습 그대로요. 보정을 하면 당장 보기엔 예쁘지만 제대로 된 우리는 아니잖아요.”

올 10월 결혼하는 서른두 살 동갑내기 예비부부 노현정·서병덕씨는 판에 박힌 웨딩 촬영 대신 흑백필름으로 웨딩 촬영을 했다. 어색한 포즈를 취하고 수많은 보정 작업을 거쳐 자신과 다른 모습이 나오는 보통의 웨딩 사진이 싫었다. 노씨는 “흑백사진 속 우리 모습이 인간적이고 서정적으로 느껴져 만족했다”고 했다. 결혼 후에도 자식을 낳은 후나 결혼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을 흑백사진으로 기록해 갈 계획이다. 노씨 부부의 웨딩 사진을 촬영한 이창주(45·등대사진관) 작가는 “흑백사진은 가진 색을 다 빼다 보니 사물 그 자체를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1850년대 사진기법인 습판사진을 하는 ‘등대사진관’(위). 필름 인화 작업을 하는 연희동사진관의 암실(아래).

『밝은 방의 아리아-소여니아의 사진노트』의 저자 황소연(47) 작가는 컬러사진을 각종 맛있는 반찬으로, 흑백사진을 흰밥에 국 한그릇으로 묘사했다. 그는 “색은 각종 맛난 반찬처럼 쉽게 우리를 유혹하지만 아무리 맛난 반찬도 밥 없이 먹으면 싫증을 느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흑백사진은 컬러사진보다 덜 질린다”고 설명했다.

사진 촬영 후 보정 작업이 당연해진 요즘 한번 찍고 나선 수정이 어려운 필름 사진의 단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장점이 된다.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흑과 백의 농도로 피사체를 표현하는 흑백사진은 가장 사실적으로 피사체를 보여준다. 흑백이 지닌 단순함은 오히려 지루하지 않고 깊이가 있어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흑백사진 전시회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3년 전부터 취미로 흑백사진을 찍어온 안성호(46)씨는 “색을 배제한 순수한 형태와 흑백, 명암의 차이, 빛과 그림자로만 표현되고 거기서 오는 미묘한 차이가 매력적이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러한 매력 때문에 흑백사진 전시회를 찾아다닌다”고 말했다. 실제 흑백사진전은 사진 전시회 중에서도 유독 사람이 몰린다.

흑백사진은 ‘새롭다’

“흑백사진 속 제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었어요. 백일 사진부터 모두 컬러였으니까 당연한 거죠. 그래서 그런지 흑백사진이 새롭고 재미있더라고요.”

김아영(31)씨는 흑백사진 속 자신의 모습이나 풍경이 새롭게 느껴져 종종 흑백사진을 찍는다. 어떤 때는 오래된 앨범에서 본 엄마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흑백사진을 SNS에 올리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좋다. 김씨는 “평소랑 다른 느낌이 난다. 분위기 있다고 말해준다”며 웃었다.

김씨처럼 태어날 때부터 컬러 TV와 사진이 익숙한 30대 중반 이하의 사람들에게는 흑백사진이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오래된 구닥다리 문화가 아니다. 노현정씨는 “웨딩 촬영 때 흑백사진을 찍기 위해 꽃무늬 원피스와 양장 등 1800년대 느낌이 나도록 옷을 갖춰 입었다. 주변에서 구한말 시대 사진처럼 예스러운 분위기가 색다르고 재미있다고들 한다”고 말했다.

실제 흑백사진을 즐겨 찾는 건 30대 이하의 젊은 층이다. 색다른 흑백사진이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흑백사진이 드물다는 점 때문에 희귀성이 있다. 유철수(47·흑백사진연구소 대표) 작가는 “젊은이들 사이에선 익숙한 디지털 대신 아날로그 문화인 흑백사진이 고급문화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도 ‘흑백사진이 새롭게 느껴진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는 “옛것이라고 봤던 필름 카메라나 흑백사진이 새로운 것으로 재발견됐다. 반대로 이제 디지털카메라로 찍으면 너무 평범하게 느껴진다. 할아버지·할머니조차 DSLR로 사진을 찍는 시대 아니냐”고 말했다.

인물 사진뿐이 아니다. 흑백으로 촬영한 풍경은 눈으로 본 세상과는 다른 느낌을 받기도 한다. 황소연 작가는 흑백사진을 ‘세상을 다르게 보는 통로’로 정의했다. 그는 “흑백사진을 보면 왠지 묘하다. 총천연색으로 이뤄진 세상을 흑백으로 대하면 생경함이 찾아든다”고 설명했다.

흑백사진은 ‘다리’다

“흑백사진은 세대를 연결해줘요. 경험이 없는 20~30대가 부모 세대의 문화인 흑백사진에 관심을 갖잖아요. 평양냉면 맛을 모르는 젊은 세대가 냉면집을 찾아다닌 것처럼요.”

손영주 한미사진미술관 학예팀장은 흑백사진을 세대 간 연결고리라고 표현했다. 국내 최초의 사진미술관인 한미사진미술관은 2003년 개관 이후 꾸준히 흑백사진전을 열고 있다. 손 팀장은 “지금까지 흑백사진 위주로 전시회를 열고 있다. 요즘은 흑백사진 자체가 귀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고 사람들의 반응도 좋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20~30대의 젊은 관람객이 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역할도 한다. 디지털 사진은 카메라로 찍어 온라인으로 인화를 주문한다. 이 때문에 동네마다 있던 사진관들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러나 요즘 다시 작은 사진관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있다. 이들은 흑백필름으로 사진을 찍는다. 계동·이촌동·연희동처럼 개발이 느리게 진행되는 지역에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동네의 정겹고 소박한 분위기가 흑백사진과 잘 어울리는 곳이다. 지난달 이촌동에 ‘등대사진관’을 연 이창주 작가는 “기찻길 때문에 개발이 덜된 이촌동과 흑백사진이 제법 잘 어울린다. 아직 정식으로 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동네 사람들이 들어와 편하게 수다를 떨기도 하고 응원해 주신다”고 말했다.

▶흑백사진 촬영할 수 있는 사진관

[물나무]
국내 첫 흑백 전문 스튜디오

계동 현대그룹 사옥 뒤편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 눈앞에 촘촘하게 들어선 한옥들이 나온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오른쪽에 2층짜리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흑백사진 전문 사진관 ‘물나무’다. 일간지 사진기자 출신으로 독립 스튜디오를 차려 다양한 사진을 촬영해 온 김현식(45) 대표가 2010년 문을 연 국내 최초의 흑백사진 전문 스튜디오다.

‘가장 한국적인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으로 역사를 공부하다가 조선시대 사진 역할을 대신했던 초상화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김 대표는 “조선시대 당시 초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게 털 한 가닥까지 똑같이 그리는 것이었다. 사람의 역할이 적은 컬러사진에 비해 흑백사진은 작가의 의지에 맞게 사진을 컨트롤 할 수 있어 흑백사진 전문 사진관을 열게 됐다”고 말했다.

흑백사진은 23만원부터. 예약은 필수다. 흑백 폴라로이드 사진은 1장당 3만원으로 예약 없이도 촬영할 수 있다. 최근엔 작가가 카메라를 미리 세팅해 놓고 모델 스스로 셔터를 눌러 촬영하는 ‘자화상’과 한지에 사진을 인화해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는 상품 등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흑백 폴라로이드 사진은 1장당 3만원으로 예약 없이도 촬영할 수 있다.

○ 전화번호: 02-798-2231
○ 주소: 종로구 계동 133-6
○ 운영 시간: 오전 10시~오후 8시(화요일 휴무)

[등대사진관]
돌아온 19세기 습판사진

기찻길 때문에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어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서부이촌동에 있다. 동갑내기 사진작가 이창주(45)·이규열 작가가 ‘As You Are’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지난달 문을 열었다. 포토샵 수정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 흑백사진,

그중에서도 일반적인 카메라 필름을 사용하지 않고 과거 습판사진 기법으로 촬영해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최대한 살린다. 습판사진이란 필름이 아닌 유리판이나 철판 위에 인화용액을 칠해 거기에 빛을 쪼여서 찍는 초기 사진 기술로 1852년 발명돼 건판사진이 도입된 1880년대까지 사용됐다. 웻타입이라고도 불린다. 오래된 듯한 느낌을 살릴 수 있다. “디지털카메라는 수정하는 과정에서 왜곡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사진을 찍기 위해 수정할 수 없는 필름 카메라, 그중에서도 사진이 처음 시작되던 당시의 기술인 습판사진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습판사진 제작에는 촬영 후 열흘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흑백필름 사진은 20만원대. 예약은 필수.

○ 전화번호: 02-3785-3014
○ 주소: 용산구 한강로3가 40-39
○ 운영시간: 오전 10시~오후 7시(일요일 휴무)

[연희동사진관]
푸근한 동네 사진관의 추억

작은 공방과 갤러리들이 주택가 곳곳에 자리한 연희동, ‘사러가마트’에서 서연중학교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하얀색 외벽의 2층 건물이 눈에 띈다. 바로 지난 5월 문을 연 연희동사진관이다. “과거 동네마다 있던 사진관들이 사라져 아쉬운 마음에 동네사진관을 열게 됐다”는 김규현(29) 대표는 사진관 내부를 마치 과거의 동네 사진관처럼 꾸몄다.

흑백사진뿐 아니라 컬러사진도 촬영할 수 있지만 손님들은 흑백사진을 좋아한다. 김 대표는 “흑백필름이 언제까지 생산될지 모른다고 하면 고객들 대부분이 흑백사진을 찍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사진을 전공한 김 대표에게 흑백사진의 의미는 남다르다. 그는 “디지털 사진만 찍다 보니 점점 사진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게 됐다. 사람 냄새가 나는 사진을 찍고 싶었다. 사진을 시작할 때 처음 배운 흑백사진을 통해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촬영 후엔 필름을 보고 마음에 드는 사진만 골라 인화할 수 있다. 현상·인화·액자(57)까지 할 경우 한 장에 18만원부터. 인화 않고 필름만 사면 15만원. 흑백 폴라로이드 사진은 3만원. 흑백 암실 수업도 하는데 총 8회(1개월) 수업에 25만원(재료비 포함)이다.

○ 전화번호: 010-9207-4742
○ 주소: 서대문구 연희동 115-1 1층
○ 운영시간: 오전 10시~오후 8시(월요일 휴무)

글=송정·조한대 기자 song.jeong@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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