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치식 없어지기 전에 … 더위도 잊은 주택담보대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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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에 사는 강모(37)씨는 11월 전세 계약이 만료되기 석 달 전인 8월 초 미리 집을 사서 옮겼다. 내년부터 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심사가 강화된다는 소식에 미리 대출을 받았다. 강씨는 “당장은 월급으로 이자 갚기도 빠듯해 첫 3년 동안은 이자만 내는 거치식 주택담보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내년부턴 원금과 이자를 함께 갚아가는 대출만 가능해진다고 해 대출을 앞당겼다”고 말했다.

 강씨 같은 대출자가 늘면서 이사 비수기인 여름철인데도 7~8월 국내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본지 조사 결과 31일 현재 5대 시중은행(KB국민·우리·신한·농협·하나)의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294조4957억원으로 집계됐다. 7월 289조6387억원에 비해 1.67%(4조8750억원) 늘어난 금액으로, 6월에 이어 두 달 연속 상승세다. 이들 5개 은행이 5~7월 주택금융공사에 넘긴 안심전환대출 채권 25조원어치를 합하면 실제 증가세는 더 가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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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담보대출이 늘자 주택 매매도 활발해지고 있다. 서울시 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8월 말 현재 서울의 아파트 거래량(잠정치)은 9864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45%(3089건) 늘었다.

 주택담보대출이 늘고 있는 건 내년부터 거치식 대출을 제한하는 대신 원금·이자 균등분할 상환을 확대하는 가계부채 관리 대책이 시행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대출 원금을 갚는 것보다 대출을 받은 지 몇 년 지난 뒤에 그동안 모은 돈과 월급을 합쳐 원금을 갚는 쪽을 택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저금리 기조에 따른 전세난이 여름철에도 해소되지 않은 영향도 크다. 전셋값 상승분을 감당 못하는 세입자가 전세대출 대신 주택담보대출을 선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은행권과 부동산 업계에서는 현금 여력이 많지 않은 신혼부부 중심으로 대출 수요가 늘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박원갑 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전통적인 신혼부부 이사철인 가을을 앞두고 집값이 오르기 전에 남들보다 한발 먼저 움직이려는 이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여기에 다주택자의 청약 규제가 완화되자 분양권 차익을 노리려는 투자 수요까지 가세하면서 여름 주택시장이 달아올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은행과 건설사의 ‘절판 마케팅’이 대출을 부추겼다는 지적도 있다. 은행 창구와 건설사 신규 분양 모델하우스에서 고객을 대상으로 “규제가 강화되기 전에 빨리 대출 받아 집을 사라”고 공공연하게 권유한다는 얘기다. 주택담보대출은 은행 순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로 기업 대출(60%)보다 작다. 그러나 집이라는 확실한 담보가 있기 때문에 기업 대출보다 부실 가능성이 작다는 장점이 있다. 또 대출 고객을 잘 설득하면 예금·신용카드·펀드·보험과 같은 다른 금융상품을 판매할 수도 있다. 건설업계에서는 “가급적 올해 분양 물량을 털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내년 담보대출 규제와 미국 금리 인상 등으로 주택담보대출 수요가 줄면 올해 뜨겁게 달아오른 분양 열기가 가라앉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서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28일 가계부채 점검회의를 열어 시중은행 부행장에게 “은행의 절판 마케팅이나 주택담보대출을 이용한 건설사의 신규 분양 밀어내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주문했다.

 전문가들은 연말까지 주택담보대출 증가세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 김자봉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지금은 내 집 마련 수요자와 공급자인 은행·건설사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당분간 대출은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근본적인 전세난 해법을 마련해 대출 증가가 거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속도 조절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uni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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