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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셰프, 오늘 저녁엔 뭐 먹죠?" "싱싱한 새우·야채 요리 드시죠"

중앙일보

입력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 중인 오세득 셰프(가운데)가 20일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이날의 요리 ‘로스트 푸아그라’에 대해 손님과 이야기하고 있다.

요즘 방송·잡지에 셰프·먹방·요리법이 많이 등장한다. 유명한 셰프, 대표 메뉴의 비밀 레시피 등 뭔가 이름을 내걸고 유명세를 탄다. 대중도 음식에 열광한다. 그런데 오히려 정해진 메뉴도 없이 운영되는 식당이 있다. 메뉴판 대신 이야기 보따리가 수북이 쌓여 있다.

지난 19일 오후 8시 서울 경리단길 한 식당에선 가수 최백호·아이유의 노래 ‘아이야 나랑 걷자’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이곳 셰프 홍석재(27)씨가 노래를 따라 부르며 ‘송송송송’ 양배추를 썬다. 그와 불과 50㎝ 너비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손님이 홍씨를 따라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날 무렵 이날만 맛볼 수 있는 ‘새우허브 야채야끼’가 완성됐다.
 매일 오후 7시 홍 셰프는 식당 문을 열며 제일 먼저 종이 한 장을 꺼낸다. 붓으로 무언가를 적는다. 그날의 메뉴다. 메뉴가 쓰인 종이 한 장은 돌돌 말아 원통에 꽂아놓는다. 이렇게 쓰인 메뉴 20여 가지 중 8~10종은 그날만 맛볼 수 있다. 때로는 즉석에서 손님이 부탁하는 메뉴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는 “어느 날 가게를 찾은 50대 남성 손님이 갑자기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데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며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서 요리해 제공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손님과 셰프 도란도란
이곳은 마주보고 앉는 테이블이 없다. 모두 셰프 쪽을 바라보고 일렬로 앉는다. 셰프의 요리 테이블은 기존 제품보다 일부러 25㎝ 낮춰 만들었다. 손님의 눈높이에서 대화하기 위해서다. ‘이런 이런 메뉴를 해주세요’라는 대화가 오가며 자연스레 셰프와 손님이 눈을 마주한다.
 서울 성북동의 유럽풍 가정식 레스토랑 ‘엄마키친’은 메뉴판도, 메뉴가 쓰인 어떠한 종이도 없다. 이곳 이새봄(29·여) 셰프가 12년간 유럽에서 살며 익힌 ‘유럽식 집밥’이 메뉴다. 손님의 95%는 전화로 예약한다. 예약 손님이 있으면 문을 열고, 없으면 문을 열지 않기도 한다. 16석에 불과하지만 전화 예약이 밀려 들어온다. 이 셰프는 “예약할 때 키위·복숭아 등 식품 알레르기 사항이나 주의할 식재료를 알려주면 반영한다”면서 “테이블 옆에 서서 요리를 직접 해주고 손님과 대화하며 이야기와 함께 코스 요리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독창적인 요리 시식 기회
이 같은 메뉴판 없는 식당은 최근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팝업 레스토랑’과 맥을 같이한다. 팝업 레스토랑은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한 달가량 한 장소를 빌려 운영하는 임시 레스토랑을 말한다. 파리, 런던, 뉴욕·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셰프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독창적인 ‘팝업 메뉴’가 탄생한다.
 그날그날 신선한 식재료를 사용하면서 날마다 메뉴가 바뀐다. 셰프는 실험적인 메뉴로 고객의 입맛에 도전하고, 고객은 진부한 맛에서 벗어나 색다른 맛을 경험할 수 있다. 서울 반포동에서 고정된 메뉴판이 없는 레스토랑 ‘스와니예’를 운영하는 이준 셰프는 한때 팝업 레스토랑에서 날마다 자신만의 요리를 만들었다.
 이 같은 메뉴판 없는 식당은 서울 반포동 서래마을과 이태원 등지를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다. 전화로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를 끈다. 셰프가 수시로 메뉴를 바꿔 내놓거나 손님이 원하는 메뉴를 즉석에서 또는 전화로 주문하는 형태가 주를 이룬다. 임경숙(대한영양사협회장) 수원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메뉴판 없는 식당은 주인장(셰프)의 손맛을 아는 사람만 찾아온다는 미식가의 자부심이 그 가치를 높여줄 수 있지만 영양이 골고루 들어 있도록 충분히 연구해 만들어진 식단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짧은 시간에 메뉴를 바꾼다는 점에서 수십 년 맛집의 메뉴만큼 유래 깊은 맛을 느끼기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글=정심교 기자 jeong.simkyo@joongang.co.kr, 사진="서보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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