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성범죄에 이용당하는 경로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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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형경
소설가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유치원에서 아이를 데려오는 젊은 엄마와 딸, 이웃으로 보이는 노인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의 시선은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여자 아이에게 꽂혀 있었는데, 그가 문득 아이 등에 업히듯 몸을 접촉시키며 “할아버지 좀 업어보자”라고 말했다. 아이가 몸을 비틀며 명백히 불쾌감을 표현하는데도 노인은 뒤에서 안는 자세를 더 밀착시켰다. 놀라운 사람은 아이 엄마였다. 그는 낯을 찡그리는 아이를 나무랐다. “할아버지가 예쁘다고 그러시잖아.” 무지한 어른들 사이에서 고통 받던 아이 얼굴이 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아동 성추행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생활 속에 정착되기까지는 요원해 보인다. 심리학자 스티브 비덜프는 “호주에서 어린이들은 대체로 가족이나 친척, 주위 사람들에 의해 여섯 명에 한 명꼴로 성추행당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역주도 있다. “호주에서는 아이가 싫다는데 껴안는 경우나 예쁘다면서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아동 성희롱에 포함된다.”

 아동 성추행에 대한 관념뿐 아니라 성범죄 전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규범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관대하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의 성범죄에 대해, 남성 입법자들이 만든 법률은 그 자체가 간혹 여성에게 가해지는 두 번째 폭력처럼 보이기도 한다. 경로사상조차 이상한 방식으로 성범죄에 이용당한다. 위에 언급한 아이 엄마처럼 여성 쪽이 그런 점에 더욱 취약해 보인다. 한 성범죄 피해 여성은 가해 남성에 대해 진술하면서 “그분께서 어떻게 하셨다”는 극존칭 말투를 사용했다. 그럴 때 우리는 출구 없는 관습의 덫에 갇힌 듯하다.

 “남자로서 우리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의무는 성적인 방식으로 아이들과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아이들에게, 그들의 성이 폭력적인 지배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비덜프의 말이다. 사실 경로사상은 위 세대가 먼저 아이들을 존중해줄 때 형성되는 미덕이다. 아동을 상대로 힘을 행사하려는 어른들은 스스로가 약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약자를 마음대로 통제할 때만 내면의 불안감에 닿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동과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못난 부류라 할 수 있다. 확인해보지 않아도 그는 피라미드 권력 구조 가장 아랫면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심리적으로.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