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일 신혼여행 … 한 번도 안 싸웠죠, 행복하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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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철·정민아 부부가 스위스 체르마트에서 찍은 사진. 왼쪽 뒤로 알프스 최고봉인 마테호른이 보인다. 정씨는 유럽 여행을 다시 오게 된다면 꼭 다시 들르고 싶은 곳으로 체르마트를 꼽았다. [사진 오재철]

414일. 4계절을 보내고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할 시간 동안 남자와 여자는 늘 함께 있었다. 둘은 많이 달랐다. 여자는 새벽에 핀 물안개를, 남자는 초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을 좋아했다.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도 남자는 영화 ‘시네마 천국’을 상상하며 황홀해 했고, 여자는 지루해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심했다. 각자의 시선에서 여행기를 써보기로.

 오재철(42)·정민아(34) 부부 얘기다. 두 사람은 지난 2012년 10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414일간의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중남미 222일, 유럽 96일, 북미 96일의 여정이었다. 최근에는 유럽 여행기를 담은 『함께, 다시, 유럽』을 펴냈다. 책에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도 다른 기억을 공유한 부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곧 남미 여행기도 함께 써내려갈 예정이다.

 가기 전부터 주위에선 ‘돈이 그렇게 많냐’고,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우려의 말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정민아씨는 “여행을 원했고, 옆에 같이 가고싶은 사람까지 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고 했다.

물론 대가가 없는 건 아니었다.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일하던 오재철씨는 거래처와의 관계가 끊기는 걸 각오해야 했고, 웹 기획자인 정씨는 7년 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식장은 윤달에 무료로 빌려주는 데로 잡고, 스튜디오 촬영은 셀프로, 예단·혼수 등은 생략해가며 여행 비용을 모았다. 팔 수 있는 건 중고 물품 시장에 모두 팔았다. 그렇게 모은 돈이 5000만원 남짓. 예상 여행 기간은 1년이었다.

 실제는 예상보다 60일 정도 더 있었다. 오씨의 카메라 덕분이었다.

두 사람은 오씨가 찍은 사진을 다른 무언가와 맞바꾸는 ‘물물교환’을 했다. 호스텔 홍보용 사진을 찍어주는 대신 공짜 숙박을 얻고, 크루즈 여행 사진을 찍는 조건으로 1인당 150만원짜리 갈라파고스 여행도 무료로 갔다. 차를 빌려 ‘차숙(車宿)’을 한 날도 많았다. 여러모로 불편했지만 그래도 그 낭만이 좋았다.

발밑으로 푸른 해변이 보이는 마르세이유의 해안절벽 위, 새벽마다 물안개가 짙게 피던 스코틀랜드의 들판 등 곳곳이 두 사람의 ‘이불’이었다. 그 순간 행복은 멀리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씨는 “여행 중 ‘아, 진짜 행복하다’라고 느낀 순간 내 곁엔 배낭 하나와 동반자 한 명 뿐이더라. 여행을 통해 진짜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됐다”고 했다.

 “여행하다 싸운 적은 없었나” 고 물으니, “한 번도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씨는 “여행을 통해 서로 다른 점을 찾아가는 게 오히려 즐거웠다”며 웃었다.

여행 이후 좋은 일도 많이 생겼다. 예쁜 딸이 태어났고, 각종 기관에서 세계여행 사진 강좌 의뢰도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서로에게는 더 큰 신뢰가 자라났다. 414일간의 일탈은 그렇게 해피엔딩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뒷감당이 두려워 망설이는 경우가 많은데 경험자 입장에선 일단 ‘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망설이고 있는 지금이 어쩌면 가장 최적의 타이밍일지 모르니까요.”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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