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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연대의식 상실은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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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사람이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한 국가도 흥할 때가 있으면 반드시 망할 때도 있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입증된 확고불변의 법칙이다.

이 같은 법칙은 국가 규모의 대소를 불문하고 관철돼 왔으니 오늘날 전세계를 호령하는 미국이라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과연 우리는 흥망의 어느 쪽 경사면에 서 있는 것일까.

어느 나라가 망할 때 흔히 보이는 현상이 내우외환이다. 즉 안으로는 분쟁과 반란이 격화하고. 밖으로는 외적의 압박과 침입이 겹칠 때 국가는 완전히 통제력을 상실하고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 국가 흥망 결정짓는 중요 요인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망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한 것이지, 어찌해서 그 지경에 이르게 됐는지 '원인'을 지적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14세기 아랍의 천재적인 역사가 이븐 할둔(Ibn Khaldun)은 '연대의식(連帶意識)', 즉 집단 결속력이야말로 국가의 흥망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황야의 거친 환경 속에서 생활하면서 불굴의 정신과 검약한 습속을 갖는 집단만이 강력한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은 외부의 위협을 막아내고 나아가 주변의 다른 집단들을 흡수하면서 도시들을 정복하고 국가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건국 주체인 제1세대를 이은 다음 세대는 국가를 더욱 발전시키고 번영을 구가하지만 동시에 안정이 가져다 주는 사치와 편안함 속에서 서서히 연대의식을 상실해 가고, 마지막으로 제3세대는 조상들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 나라를 세웠는지 망각한 채 현재의 번영이 오로지 자신들의 능력 때문이라고 착각하며 마침내 국가 흥망의 근본인 연대의식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은 어떤 세대에 속하며 우리가 갖고 있는 연대의식의 강도는 어느 정도일까. 궁극적인 판정은 한 1백~2백년쯤 지난 뒤의 역사가들이 내릴 일이겠지만, 아마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제발전을 이뤄내고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싸웠던 시대의 사람들이 제1세대로 평가받지 않을까 싶다.

그 시대의 흑백사진들 속에는 수척한 몸매에 허름한 옷차림 속에서도 번득이는 눈빛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헝그리' 정신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상의 불경기라는데도 향락과 사치 산업은 불황을 모르고, 돈많은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며, 3백만명이 넘는 신용불량자들에 의해 누적된 부채는 10조원에 이른다.

의과대학이라면 지방의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지만 서울대 공대는 마다하고, 대학도서관은 고시생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데 학문을 하겠다고 박사학위를 딴 사람은 처자식에게 유언장을 쓰고 자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상황이 이러니 '연대의식'을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는 제2세대는커녕 망국을 눈앞에 둔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한마디로 그 원인은 국가와 사회를 이끌고 가는 지도층이 갖는 권위의 붕괴에 있다. 그것은 정당한 권위를 따라주지 않는 국민의 고집과 몽매함 때문이 아니라 올바른 권위를 세우지 못하는 지도층의 무능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 냉소.야유의 대상이 된 지도층

국가 지도자의 진정한 권위는 탁월한 언변과 다정한 몸짓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확고하고 신뢰할 만한 통치력에서 나온다. 배우의 권위는 외모가 아니라 연기력에서, 가수의 권위는 춤솜씨가 아니라 가창력에서, 학자의 권위는 달변이 아니라 높은 학식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그는 국민의 뜻을 헤아려 나라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세우고, 확고한 신념과 엄정한 규율을 통해 국민을 결집시키는 연대의식의 진원지가 돼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지금처럼 분열과 대립 속에 표류하는 것을 방치한다면, 우리가 후세의 역사가들로부터 나라를 절단낸 '망국'의 세대였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金浩東(서울대교수, 동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