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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그 “남성에 대한 차별도 걷어내야 진정한 양성평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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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이 지난 4일 한국 대법원 4층 대회의실에서 국내 언론 중 유일하게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만든 모든 장벽을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조문규 기자]

아내와 사별한 뒤 아이를 홀로 돌보는 아버지에게도 양육수당을 지급하라는 미 연방대법원의 1975년 판결과 동성 커플의 결혼을 금지한 미 4개 주의 주법은 위헌이라는 연방대법원의 2015년 판결 .

 40년 차이 나는 두 개의 대법원 판결의 주역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82) 미 연방대법관이었다. 전자는 긴즈버그 대법관이 미국 시민자유연합(ACLU) 법률 고문으로서 소송을 수행해 승소한 것이고 후자는 대법관으로서 직접 위헌 판결한 것이다. 그가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없는 ‘양성(Gender)평등’의 외길을 걸어왔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미국 여성 인권운동의 대모’로도 불리는 긴즈버그 대법관은 지난 4일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평등을 이루려면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 대한 차별적 장벽까지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진정한 양성평등은 남녀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제공되도록 해주자는 것”이라면서다.

 그는 87년 8월 샌드라 오코너 전 대법관 이후 28년 만에 방한한 미 연방대법관이다. 93년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긴즈버그를 대법관으로 지명한 건 67년 존슨 대통령이 흑인 민권운동가 출신인 서굿 마셜을 지명한 것에 비견됐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9인의 종신제 연방대법관 중 최연장자로 22년째 재임 중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대법관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인 그는 “지난해 말 심장혈관 스텐트 시술을 받은 뒤 트레이너 권고로 매일 20번씩 하던 푸시업을 일주일에 두 번으로 줄였지만 건강은 좋다”고 말했다. 종신제와 관련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조항인 헌법 3조가 대법관의 종신직과 임기 동안 보수가 줄지 않도록 보장하고 있다”며 “사법부의 독립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 소토마요르와 케이건의 임명으로 연방 대법원에 여성 트로이카 시대가 열렸다. 대법관 구성의 다원화로 가장 달라진 점은.

 “샌드라 오코너가 떠난 뒤 8명의 건장한 남성 대법관이 앉아 있는 법대 벤치 맨 끝에 왜소한 나 혼자였다. 지금은 내가 벤치 가운데 앉고 오른쪽에는 소니아 소토마요르가, 왼쪽에는 엘리나 케이건이 있다. 그림부터 달라졌다. 이렇게 구성이 바뀌니 연방대법원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 달라졌다. 여성 대법관 임명은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양성평등을 위한 오랜 노력의 결과다. 소토마요르는 당사자들에게 가장 많은 질문을 하는 대법관이고, 케이건은 유머가 많지만 정곡을 찌르는 질문으로 정평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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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대법원은 연 3만6000건이 넘는 사건을 처리한다. 최근 상고법원을 설치해 대법원이 사건 수를 줄이려고 한다.

 “미국은 52개 주(州)별로 다른 52개 사법제도가 있고 연방 사법제도가 있다. 재산·계약소송 등 시민들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일반 사건은 주법원이 모두 처리하지 연방대법원은 다루지 않는다. 잘못된 하급심을 바로잡는 것도 연방대법원의 일이 아니다. 연방법과 헌법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때, 전국에 통일적인 법 적용이 필요한 사안에만 연방대법원이 개입한다. 한국처럼 많은 사건이 밀려올 일이 없다. 연간 8000건의 상소 신청 중 심리를 허가하는 사건은 80건 정도다. 연방대법원 업무 중 3분의 1은 어떤 사건을 심리할지 정하는 일이다. 한국 대법원은 미국 주 대법원과 연방대법원을 합친 것과 같다.”

 - 지난달 연방대법원의 동성혼 합헌 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연방대법원이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4개 주에서 소송이 접수돼 대법원도 연방수정헌법 14조 평등보호원칙에 따라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과거에는 동성애 자체를 불법으로 봤지만 동성애자에 대한 주거·고용 등 차별이 위헌이란 판결이 잇따라 나오면서 국민 인식이 바뀌었다. ”

 - 소수 의견을 많이 내는 대법관으로 유명하다. 소수 의견의 가치는.

 “연방법에 대한 소수 의견은 의회에 법을 바꾸라는 것이고, 헌법 해석에 관한 소수 의견은 미래 법원에 대한 바람이다. 2007년 레드베터 사건에서 굿이어타이어사에서 일한 레드베터는 남성과 여성의 임금 차별은 미국 민권법 제7조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대법관 다수는 소 제기 기간 180일이 지나 소송을 냈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나 의회는 소수 의견을 받아들여 2009년 ‘릴리 레드베터 공정임금법(Lilly Ledbetter Fair Pay Act)’을 제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홈스와 브랜다이스 대법관이 시민들의 반전 주장을 (방첩법에 의해) 안보의 위협이라고 처벌하는 것은 수정헌법 제1조 표현의 자유 위반이란 소수 의견을 냈다. 훗날 이들의 주장이 다수 의견이 됐다.”

 - 70년대 ACLU 활동으로 여성 인권운동의 대모로 불리게 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 ‘리드 사건(Reed v. Reed)’이다. 샐리 리드는 이혼 후 자살한 아들의 부동산의 관리권을 갖겠다고 신청했지만 결국 관리권은 전 남편에게 돌아갔다. 죽은 자식의 자산관리권은 무조건 남자에게 준다는 아이다호 주의 법 때문이었다. 71년 ACLU는 샐리를 대변해 연방대법관 만장일치로 위헌 결정을 받아냈다. 성적 차별을 이유로 한 최초의 위헌결정으로 여권 신장의 전환점이 됐다. 75년 아이를 홀로 키우는 홀아비에겐 양육수당을 주지 않는 사회보장법의 위헌판결을 받아냈다. 이 판결로 남성과 여성, 아동 등 모든 이에게 사회보장 혜택이 돌아가게 됐다.”

 - 한국에도 두 명의 여성 대법관이 있고, 많은 여성 법률가가 탄생하고 있다. 이들에게 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여러분의 딸들을 생각하라. 법조인이 된 여러분과 같은 기회를 딸들도 갖게 해 줘라. 『윌리엄의 인형』이라는 책이 있다. 인형을 가지고 놀고 싶은 남자아이의 이야기다. 남자아이라고 자동차만 가지고 놀게 하지 말고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줘라. 인간이 만든 모든 장벽을 걷어내야 한다. 유머를 잃지 마라. 모욕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시어머니가 내가 결혼할 때 ‘결혼생활 유지의 비결은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조언에 따라 56년간 결혼생활을 잘해냈고 판사로서 동료들과 지낼 때도 도움이 됐다.”

정효식·임장혁(변호사) 기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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