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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이상용의 영화 속 철학 산책] 시민 케인(1941)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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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호 24면

3 영화 ‘시민 케인’은 위대한 영화 리스트에 거의 매번 1위로 꼽히는 작품이다. 스물 다섯의 오손 웰즈가 감독과 주연을 겸한 이 작품은 누구나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있는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묻는다는 점에서 시공을 초월하는 생명력을 갖는다.

세상을 바꾸지 못한 남자
그래서 케인은 ‘시민’이다

[영화 속에서] 이상용 영화평론가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단어 중 하나가 ‘로즈버드(rosebud)’다. 이 말이 유명해진 이유는 오손 웰즈의 데뷔작 ‘시민 케인’ 덕분이다. 얼마 전 발표된 영국 BBC의 미국 영화 베스트 100 선정에서도 늘 그랬던 것처럼 1위에 등극한 ‘시민 케인’은 미국 영화의 신화가 된 작품이다. 오손 웰즈는 이 영화에서 케인이라는 인물의 신화 벗기기에 나선다.

케인이 마지막에 남긴 말 로즈버드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다니는 톰슨 기자에게 케인과 한 시절을 같이 보냈던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하고 경험한 케인을 들려준다. 그리고 톰슨 기자는 허망한 결론에 도달한다. “로즈버드는 그가 가질 수 없었던 것, 아니면 그가 가졌지만 잃어버린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민 케인’은 로즈버드의 의미와 케인이라고 하는 인간의 허망한 인생을 추적하는 영화일망정 결코 허망한 영화는 아니다. 그만큼 영화가 던져주는 주제 의식은 묵직하다. 이 영화에 쓰인 유명한 기법 ‘딥 포커스(deep-focus·광각렌즈를 이용, 초점을 화면구도의 중앙에 맞춰 전경과 후경 모두를 선명하게 찍는 촬영기법)’는 관객을 인간의 내면으로 한 발짝 데려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케인의 지인들이 들려주는 증언은 너무나 생생해 우리는 전기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그것은 허망한 말들의 향연이다. 그들의 말을 증명할 길도, 그들의 사랑과 증오에 반문할 방법도 없다. 세상을 떠난 한 인간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되새김질 할 따름이다.

1 유럽에서 제작된 포스터 . 2 영화속 어린 케인의 모습.

세상을 자기 안에 가두는 중년의 케인
25살의 젊은 감독은 생뚱맞게 던져진 로즈버드의 의미를 쫓는 과정을 통해 누구나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공허를 절묘하게 묘사해 낸다. 로즈버드는 결국 삶의 공허함에 대한 치열한 의미 추구의 상징이다. 허망한 인생을 만들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각자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는.

케인 역시 그렇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양아버지 대처와 싸우며 자본가를 공격하고, 막대한 유산으로 인콰이어러지를 인수하는 혈기방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주지사 선거 막판에는 스캔들로 인해 무너져 버리기도 하며, 정치를 포기한 채 조금은 모자란 수잔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기도 한다. 그토록 대중 앞에서 호방했지만 결국 대저택에서 홀로 삶을 마감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케인의 모델은 동시대 언론인이었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였다. 그는 이 영화의 제작 소식을 듣고 개봉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관객의 입장에서 허스트와 영화의 사실관계는 전혀 흥미롭지 않다. 오히려 다양한 해석과 상상력으로 로즈버드를 찾아 저마다의 케인을 발견하는 재미야말로 이 영화의 매력이다. 이번에 내게 다가온 케인은 정치적 스캔들 이후 급격하게 몰락하기 시작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젊은 날의 케인은 세상에 다가가려고 싸웠지만 중년 이후의 케인은 세상을 자기 안에 가두어 버린다. 거대한 성을 짓고 세계의 풍물을 사들인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 한 남자의 좌절의 이야기다. 그래서 로즈버드는 썰매일 수도, 수정 구슬일 수도, 두 번째 아내 수잔의 노래소리일 수도 있다.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케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의미를 무엇으로 채우든 가능하게 되어 있는 이 영화의 신비로운 구조는 아메리칸 드림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20대에 쓰여진 또 하나의 위대한 미국 작품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떠올리게 한다.

좌절한 남자가 남긴 ‘로즈버드’의 뜻은
1925년 발표된 ‘개츠비’는 ‘시민 케인’의 선배다. 독자들은 개츠비가 벌이는 사업이 정직하지 못하고, 그의 모순적 인간됨을 소설 곳곳에서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에는 ‘위대한’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무엇이 도대체 위대한 것일까.

강 건너 집을 짓고 매일 밤 파티를 벌이는 개츠비의 목적 중 하나는 첫 사랑이었던 데이지에게 다가가기 위함이었다. 화자인 닉은 그런 개츠비를 보며 연민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톰슨 기자도 두 번째 부인 수잔에게 “케인에게 동정심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런 인물들은 모두 거친 인생을 살았지만 이상하리만치 순수하고 순진한 구석들이 있다. 바로 그것을 두고 피츠제럴드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으며 오손 웰즈는 ‘시민’이라는 표현을 썼다. 시민은 보통 사람, 보통 미국인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케인이 보통 사람일 수가 있는가. 그렇다. 꿈이 좌절된 자이기 때문이다. 좌절된 자의 초상은 시대를 넘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기꺼이 저마다의 로즈버드를 지니고 극장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가 소중히 여긴 걸 아는 것

[영화 밖으로] 강신주 대중철학자

케인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오손 웰즈는 그의 지인도 순차적으로 배치한다. 유년시절 케인의 후견인이었던 은행가 대처는 고인이 되었기에 그가 남긴 비망록이 대신한다. 언론인이자 직장 후배인 번스틴, 친구 리랜드, 두 번째 부인 수잔, 그리고 집사 레이몬드를 통해 관객들은 처음 보았던 부고 영상보다 더 자세하게 케인에 대해 알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 중 누구도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몰랐다. 때문에 케인이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들이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인상을 관객들은 받게된다. 모두 자기의 관점에서, 혹은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 케인을 일정 정도 왜곡해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로즈버드’는 케인을 이해하는 열쇠
이것이 웰즈가 이 영화로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아무리 친해도 그 누구도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진리! 웰즈는 이것을 바로 ‘로즈버드’라는 케인의 유언에 응축시켰던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웰즈는 관객들에게 한 가지 느낌을 갖도록 만든다.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아무리 케인과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케인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이같은 웰즈의 탁월함은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집사 레이몬드와의 인터뷰가 끝날 무렵, 케인의 대저택은 분주하기 이를 데 없다. 수집품 정리 때문이다. 사회적 평판, 친구, 애인 등 거의 모든 것을 잃은 케인은 물건을 수집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자신의 상실을 무언가로 보충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인이 사라진 소장품들은 남겨진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분류된다. 남은 사람들 눈에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물건들은 거대한 벽난로에 던져진다. 덧없이 사라져가는 물건 하나에 웰즈는 카메라 앵글을 맞춘다. 흔하디흔한 목재 썰매. 그런데 썰매 표면에 뭔가 보인다. 장미꽃 봉오리 문양과 함께 ‘로즈버드’라는 선명한 상표가.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다. 로즈버드는 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도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그를 가장 잘 안다고 했던 다섯 사람은 로즈버드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한 사람이라도 알았더라면, 어떻게 그것이 벽난로에 던져질 수 있다는 말인가.

연기와 재로 소멸된 로즈버드와 함께 케인은 이제 정말 우리 곁을 떠나간 셈이다. 아무리 그를 기리는 영상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를 기억하는 지인들이 회고록을 쓴다고 해도, 남겨진 자들이 기억하는 케인은 그저 쭉정이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라지고, 남은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남겨졌으니 말이다. 결국 벤야민의 말처럼 죽은 자의 삶은 남겨진 자들의 값싼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다.

영화에는 케인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자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확신은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허구이자 오만이다. 반면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들은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후견인에게 거의 반강제적으로 끌려갔던 소년 케인, 그리고 주인을 잃고 눈에 덮여가던 그 쓸쓸한 눈썰매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유품 속에 들어있던 눈썰매.

떠난 자의 유품 정리할 때 느끼는 낯섦
자, 웰즈는 이제 우리에게 묻는다.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알게 된 당신은 이제 케인이란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케인의 유언속 ‘로즈버드’가 정말 그 썰매를 가리키는가. 그게 썰매를 가리킨다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만큼 케인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헐떡이면 내뱉는 마지막 단어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마지막 말이 ‘찔레꽃’일 수도 ‘리자드’일 수도, 아니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일 수도 있다. 바로 이 때, 떠나려는 사람을 잘 알고 있다는 우리의 오만은 여지없이 좌절되고 만다.

혹은 이 순간 죽은 자의 유품을 정리하며 당혹스런 물건을 발견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어머니의 옷장에서 발견된 한 번도 보지 못한 ‘참빗’일 수도, 아버지의 책을 정리하다 책갈피 속에서 떨어진 ‘편지’일 수도, 누나의 방을 정리하다가 찾아낸 어느 남자의 사진 한 장일 수도 있다. 이때에도 우리는 친숙했던 고인이 하염없이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들만의 ‘로즈버드’인 셈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들이 남긴 로즈버드를 다른 유품과 함께 태워버려도 된다. 아니면 하나의 수수께끼로 가슴에 품고 그것을 해명하려는 모험, 결코 완결될 수 없는 모험을 떠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침내 그 수많은 낯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도, 진실로 우리는 고인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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