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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프로이센 꿈꾼 일제, 토착문화 지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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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도쿄·서울
전진성 지음, 천년의상상
784쪽, 3만2000원

그리 멀지도, 그리 짧지도 않은 기간에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우리 삶의 도처에는 일본의 흔적이 남아있다. 동화가 목적이었든 말살이 목적이었든 제국은 식민지를 지배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문화 정책을 때로는 은연중에, 때로는 드러내놓고 펼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교육 편제는 물론 언어생활에까지 일제의 잔재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프로이센을 모델로 삼아 근대화를 이루려던 일본이었기에 독일의 문화가 일본을 통해 우리에게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도쿄·서울』에서는 그러한 상식을 세 나라 수도의 도시 건축 차원에서 세밀하게 고증한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였던 베를린이 고대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를 모방하여 건립된 과정을 추적한다. 그러나 베를린에 투영된 아테네는 프로이센식 권위주의 국가의 이성에 맞추어 상상된 아테네다. 따라서 옛 조선총독부 청사이자 ‘중앙청’이었던 건물에서 아테나 여신의 모습을 본다 해도, 주민에 올리브 나무를 선사했던 여신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그 아테네는 에게 해의 아테네가 아니라 베를린을 흐르는 슈프레 강가의 아테네였다.

독일제국의회 의사당(1926년 촬영). 이 건축 양식은 일본 국회의사당, 식민지 시기 조선총독부 건물 등으로 이어진다. [사진 천년의 상상]

 도시의 건설은 ‘근대’ 또는 ‘근대성’이라는 이름의 담론을 요구하며, 그것은 베를린과 도쿄와 서울 모두에서 혁명적 변화를 요구함과 동시에 그것을 억누를 반혁명의 논리까지 제공했다. 그러나 그러한 개괄적인 공통성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 내용은 달랐다. 베를린과 도쿄와 서울에 현현한 아테나 여신은 각기 다른 제물을 원했던 것이다.

 새롭게 건설된 베를린의 외관은 근대성을 표상하고 있는 듯이 보일지라도 자유와 평등을 목표로 삼는 혁명의 이상을 제물로 삼았다. 독일에서 불었던 그리스 열풍은 고대 역사를 복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국민국가의 건설이라는 현실적인, 민족주의적인 필요에 근거한 것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은 아시아의 프로이센을 꿈꾸며 헌법도 그 나라 식으로 제정했다. 에도가 도쿄로 ‘발명’되며 스스로 서양이 되고자 진력했음에도 끝내 ‘서양’이 주도한 근대 문명의 틀 속에 안착하지 못했던 일본은 ‘동양’을 모순적 대립자로 소환했다. 도쿄에 나타난 아테나 여신은 아시아적 전통을 제물로 앗아갔다. 동양이 주도한 오리엔탈리즘인 것이다.

 서울에서 ‘근대문명’은 무조건 타당한 모습으로 관철되었다. 그것은 식민지 피지배자들의 거부 의사를 원천 봉쇄하고 그들의 의식마저 식민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테나 여신은 서울에서 식민지 토착 문화를 제물로 요구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민족의 주체적 역량을 강조하는 대한민국의 문화민족주의의 뿌리가 식민지 시대에 있다는 역설을 알아야 한다. 인식은 ‘경복궁’같이 날조된 민족의 성소가 아니라 치열한 현실의 한복판에 우리의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향한다.

 저자가 인정하듯 이 책은 도시의 담론 형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의 문화사적 접근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문화사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겠다는 야심찬 포부가 겪게 된 갖가지 우여곡절을 이야기한다. 영역 침범을 죄악시 하는 우리 학계의 편협함을 극복하고 이루어낸 이 저작은 그의 포부가 충분히, 어쩌면 넘치도록 실현되었음을 웅변한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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