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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 고향의 두 모습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37호 31면

TV를 보다 보면 가끔 우리나라 기업이나 자선단체가 아시아나 아프리카 오지 마을에 학교를 지어주거나 우물을 파주는 등의 봉사활동을 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문명이 발달한 21세기에 아직도 저렇게 열악한 곳에서 사는 사람이 있을까 놀라곤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화면 속의 저 모습들, 특히 호기심 가득 찬 눈망울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고향 얘기를 해야겠다. 사람들은 고향 하면 대개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있는 농촌마을을 생각한다. 물론 내 고향도 그런 곳이었다. 지역은 서울 근교였지만 상당수의 마을 주민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산과 들, 냇가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놀았다. 메뚜기와 미꾸라지를 잡고, 진달래·아카시아·까마중을 따먹고, 썰매를 타는 등 계절에 따라 다양한 놀이를 즐겼다.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는지 해가 지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지금도 고향 하면 자연과 벗삼아 놀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이 고향에 대한 기억의 전부는 아니다. 그와는 전혀 다른 빛깔의 또 다른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마을 근처에는 미군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미군들을 볼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한 마을 아이들은 이들이 타고다니는 지프차가 신기했다. 어쩌다 마을에 지프차가 출몰하면 아이들이 모두 뒤꽁무니를 따라갔다. 그러면 미군들이 우리를 향해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것을 던져주곤 했다.

미군들은 여러모로 마을에 도움을 주었다. 본국에서 날아온 구호물자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유치원을 짓기 위한 시멘트 블럭을 원조해 주기도 했다. 그 덕분에 나를 비롯한 동네 아이들은 일찍이 조기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독립기념일로 추측되는 날에는 부대 안으로 마을 사람들을 초청해서 축하연을 열기도 했다. 그때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인공감미료에 싸구려 색소를 탄 ‘아이스케키’만 먹던 우리는 우유가 듬뿍 들어간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행복해 했다.

당시 나에게 미국은 아이스크림만큼이나 달콤하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동경의 나라였다. 미군 부대 안에 들어가면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지저분하고 우중충한 우리 동네에 비해 부대 안은 마치 미국의 한 마을에 온 것처럼 세련되고 깨끗했다. 또 이들이 던져주는 과자와 초콜릿은 어찌나 달콤하던지. 포장지마저 너무나 예뻐 도저히 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부터 나는 미국을 무조건 동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아직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군의 눈에 비쳤던 우리의 모습은 어땠을까. 요즘 텔레비전에서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가난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당시 우리를 바라보는 미군들의 시선도 이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들에게 우리는 신기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툭하면 카메라를 들이대곤 했다. 언젠가 아주 무더운 여름이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냇가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전라(全裸)로 놀고 있었는데 그때 한 흑인 병사가 다가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만약 그 사진이 본국의 신문에 실렸다면 ‘냇가에서 놀고 있는 원주민 어린이들’이라는 사진 설명이 붙었을 것이다.

이것이 고향에 관한 내 기억의 전부다. 냇가에서 헤엄을 치거나 들판에서 냉이를 캐던 것에서부터 미군들에게 초콜릿을 얻어먹고, 목욕탕에서 까만 아기, 하얀 아기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것에 이르기까지 지금 돌이켜보면 내 고향에는 전혀 상반된 두 개의 세계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상반된 세계는 지금 내 기억 속에 아름다운 공존을 이루고 있다. 당시 미군들의 눈에 우리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지프차를 따라가던 그 시절의 내 고향이 너무나 그립다.

진회숙 음악칼럼니스트 hwesook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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