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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반통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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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임진각 망배단으로 향하는 차 안은 어린 내겐 조금 무서웠다. 남쪽 땅에서 갈 수 있는 북쪽 끝에 갈 때마다 실향민인 조부모님은 입을 닫으셨다. 학교에서 “북한 사람들은 머리에 뿔이 났대”라는 말을 들었던 때다. 궁금한 건 많은데, 차 안의 적막은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듯 강렬했다. 가족들의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휴전선 너머에 있는 듯했다. 침묵이 더 많은 말을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일요일은 냉면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어른들은 처음으로 물냉면이 아닌 회냉면을 허하셨다. 어른으로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에 맵지만 설탕을 뿌리고 육수를 마셔가며 한 사발 깨끗이 비웠다. 설날은 식혜가 아닌 식해와 함께 평안도식 만두를 먹는 날. 좁쌀을 넣어 삭힌 함경도식 가자미식해가 회냉면·만두와 함께 내 ‘소울 푸드’인 이유다.

 지난 수요일 취재차 방문한 판문점에서 T-2 회담장 창밖에 서 있는 북한군 병사와 눈이 마주쳤다. 늠름한 우리 헌병의 어깨 너머, 이름 모를 그 북한군 병사는 나를 똑바로 쏘아봤다. 나도 그를 보았다. 1분처럼 느껴진 그 1초 동안 나는 그의 얼굴에서 어린 나를 만났다. 상대방이 궁금하면서도 조금은 무섭고, 하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 눈동자에 있었다.

 그가 지키고 선 판문점에서 6·25 정전협정이 서명된 지 27일로 62년이 된다. 강산이 여섯 번 변하는 동안 우리는 뭐가 변했나. 남북이 원해 남북으로 갈라진 게 아니건만 지금은 남북 모두 말로만 각자의 통일을 외치며 남 탓 하기 바쁘다. 3주 남짓 남은 광복 70주년을 무위(無爲)로 허송한다면 역사는 2015년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서울과 평양 모두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현 기득권층의 현상유지인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생각이 틀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남북 당국 모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잠시 멈추고 들었으면 하는 노래가 있다. 남쪽에서도 종종 불리는 북녘의 노래 ‘임진강’이다. “북쪽의 대지에서 남쪽의 하늘까지/높이 나는 저 새는 자유의 사자(使者)/누가 우리 조국을 둘로 나눠버렸나 ”고 노래하다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고 맺는다.

 언젠가 손주가 생기면 임진강에 데려갈 작정이다. 임진강과 망배단을 둘러보다 말이 없어진 내게 손주가 이렇게 칭얼댔으면 좋겠다. “할머니, 통일 된 지 오래됐는데 아직도 그래. 경원선 열차 타고 개마고원에 놀러 가자. 참, 나 회냉면은 몇 살 돼야 사주는 거야?” 이번 추석엔 돌아가신 조부모를 대신해 망배단에 가야겠다.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