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반정부 시위대 불태워 죽인 피노체트 정권…29년 만에 드러난 진실

중앙일보

입력

1986년 7월 2일. 한 무리의 군인들이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던 두 10대 남녀에게 다가갔다. 군인들은 이들에게 휘발유를 뿌린 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끔찍한 화상을 입은 두 사람은 군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갔다. 군인들은 이들을 산티아고 국제공항 주변에 버린 뒤 달아났다.

AP·AFP통신 등 외신들은 22일(현지시간) 칠레법원 마리오 카로자 판사가 훌리오 카스타네르 예비역 중위 등 전직 군인 7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29년 전 칠레계 미국인 로드리고 로하스(당시 19세)와 카르멘 퀸타나(여·당시 18세)를 공격해 로하스를 사망하게 하고 퀸타나에게 중상을 입힌 혐의가 인정됐다.

10대 남녀에 대한 끔찍한 ‘백색테러’는 당시 피노체트 군부독재정권의 잔혹성을 전세계에 알렸다. 칠레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했던 10대 사진가 로하스는 나흘 만에 숨졌다. 퀸타나는 전신에 화상을 입고 수 차례 대수술을 받은 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지금은 캐나다에 살고 있다.

칠레 민주화 이후 이 사건은 군부독재정권의 소행일 것으로 추정됐다. 칠레법원은 99년 과거사 진상규명을 통해 ‘정부는 퀸타나에게 47만달러(약 5억46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피노체트 정권 관련자들은 “로하스와 퀸타나가 바리케이드를 부수기 위해 갖고 있던 인화물질이 폭발한 것”이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29년 만에 진실이 밝혀진 건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한 군인이 증언을 번복하면서였다. 칠레 인권단체들은 2013년 법원에 이 사건의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당시 관련자들을 소환 조사했다. 지난해 11월 전직 군인 페르난도 구즈만은 법정에서 “카스타네르 중위 등이 상부의 지시를 받고 시위 중이던 두 사람에게 접근해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질렀다”고 증언했다. 그는 “사건 직후 군부가 작전에 참여했던 군인들에게 침묵을 강요했고 살해위협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퀸타나는 21일 칠레 코페라티바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소중한 증언을 해 준 구즈만에게 감사한다"며 "뒤늦게나마 진실이 밝혀진 것이 기쁘다. 정의는 결국 승리했다”고 말했다. 이어 “나를 공격했던 군인들도 나와 같은 10대였고 같은 독재정권 시대의 희생자”라며 “침묵을 강요당했던 그들의 처지를 이해한다”고 했다.

73년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는 17년 동안 잔혹한 철권통치를 했다. 이 기간 동안 불법감금·고문 피해자는 3만8000여 명, 살해당하거나 실종된 이는 보고된 숫자만 3200명에 이른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