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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일본 기행] 3. 우리보다 '나' 중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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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3월 15일 지바(千葉)현 모바라(茂原)시 다카시(高師)에서 열린 동네 봄 축제(일본어로 마쓰리). 중국 사자탈을 쓴 마을 대표 10여명이 북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면 주민들이 뒤를 따라 덩실덩실 춤을 추며 동네를 여러 바퀴 도는 연례 행사다.

그러나 올해는 채 반 바퀴도 돌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시민들이 도무지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구 9만명인 이 지역에선 몇년전까지만 해도 마쓰리만 열리면 수백명이 행렬을 따라 마을을 돌았고 수천명이 길거리에 나와 박수를 치며 반겼다. 그러나 그런 활기는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지난해 9월 15일의 가을 대축제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일간.지역신문에 광고까지 내며 축제 때 가마를 짊어질 지원자 3백명을 모집했지만 신청자는 불과 70명이었다. 할 수 없이 옆 동네에서 주민 1백여명을 꾸어오고 행사본부에서 일하는 노인 50명을 동원해 간신히 행사를 치렀다.

일본의 초등.중학교에는 학교 운영을 지원하는 학부모 조직인 사친회(PTA.Parent-Teacher Association)가 있다. PTA는 지난 수십년 동안 일본의 집단주의와 공동체 의식의 상징이었다.

학부모들은 바자.운동회 등 각종 학교 행사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것은 물론 학교측과 역할을 분담해 교통질서 지도, 학교 주변 순찰대 활동 등을 맡아왔다. 그런데 이 PTA가 요즘 무너지고 있다.

도쿄 인근 사이타마(埼玉)현 와코(和光)시에 있는 초등.중학교 11곳 중 6곳은 최근 "임원을 맡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PTA를 아예 폐지했다.

나라(奈良)현에서는 학부모들이 "직장 때문에 임원을 맡을 수 없다"는 측과 "그럼 모든 걸 전업주부가 떠맡으란 말이냐"는 측으로 편이 나뉘어 언쟁을 벌이다가 결국 '사다리 타기'로 임원을 뽑았다.

"병이 깊어서 도저히 임원을 맡을 수 없다"고 하소연하던 한 학부모는 '믿을 수 없다'는 다른 학부모들 때문에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어오고서야 간신히 사다리 타기를 면제받았다.

10여년 전만 해도 일본 사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개인보다는 집단', '화(和)의 문화'였다. 실제 회사에 들어가면 정년 퇴직 때까지 한 직장에서 충성을 다하고,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조직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했다.

그러나 10년이 넘는 장기 불황을 겪으며 일본 사회는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대단히 확실하게 집단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 인간관계도 '좁고 깊게'에서 '넓고 얇게'로 전환하고 있다.

도쿄(東京)대 겐다 유우지(玄田有史.노동경제)교수는 "한 직장의 동료하고만 밥 먹고 술 마시고 골프 치는 사회에 익숙했던 일본인들이 불황을 만나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된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겐다 교수는 "따라서 단순히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변했다고 볼 게 아니라 일본 사회의 '화'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고 보는 게 옳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명문사학인 게이오(慶應)대의 법학부 출신인 아소 쓰요시(麻生剛.28)는 지난달 도쿄의 대표적인 유흥가인 롯폰기(六本木)에 클럽 '프라우'를 열었다. 그는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일본 굴지의 출판사에서 1천만엔이 넘는 연봉을 받는, 이른바 '잘 나가는'샐러리맨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동료들이 구조조정으로 하나둘 퇴사하는 것을 보면서 과감히 '탈 샐러리맨'을 선언했다. 그는 "새장에 갇혀 있는 독수리보다 마음껏 날아다니는 참새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일본의 젊은 층에서는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거세지고 있다. 지난해 일본에서는 75만5천쌍이 결혼했다. 이 중 7%가 해외에서 식을 올렸다.

최근 10년 동안 5배로 증가한 비율이다. 양가 친척과 친지를 모두 불러놓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식을 치르는 전통적 방식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의 생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와타베 웨딩의 홍보담당자 아오키 사치코(靑木幸子)는 "해외 결혼식을 원하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이유를 조사했더니 '낡은 관습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아서''나만의 독특한 것을 찾고 싶어서'가 가장 많았다"라고 말했다.

취업정보 제공회사인 리쿠르트의 후나다 마미(舟田眞實)는 "올해 대졸 예정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가장 취직하고 싶은 직장'이 여행사인 JTB였으며, 상위 20사 중 여행.항공사가 다섯 곳이나 됐다"며 "10여년 전만 해도 선망의 대상이던 금융회사는 20권 안에 한 곳밖에 들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이같은 변화는 기업에도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 최근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올해 첫 직장을 얻은 18~24세의 젊은이가 정규직으로 취업한 경우는 60%에 불과했다. 90%가량이 정규직으로 입사했던 10년 전과는 딴판이다.

처음에 파견직.아르바이트 등의 형태로 사람을 채용한 뒤 나중에 정규직 사원으로 돌리는, 이른바 '1.5군 채용'이 늘고 있는 때문이다. 전직을 하는 직장인들의 수도 크게 늘고 있다.

일본사회에서 노조가 힘을 잃은 것도 탈집단화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의 구리바야시 세이(栗林世)종합생활개발연구소장은 "최근 임금.고용안정 등에서 노조가 제 역할을 못했다"며 "이처럼 노조와 근로자의 연결고리가 약해진 것도 '결국 자신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사회적 흐름에 대해 대다수 전문가들은 "어쩔 수 없는 대세""긍정적인 면이 많다"는 입장이다. 남을 본따고 축소지향적으로 사고하는 스타일에서, 창의적이며 본인이 책임지고 의사결정을 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게이오대 가네코 마사루(金子勝.경제학)교수는 "틀에 박힌 조직문화가 사라지고 개인의 창의성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며 "이는 서서히 사회의 활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없지 않다. 이른바 '히키고모리'(틀어박힌 사람이라는 뜻)라고 해서 개인주의의 대두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고 집에 처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히키고모리는 현재 1백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돼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또 '바쓰 이치(×표 1개).바쓰 니(×표 2개) '라는, 개인의 이혼 횟수를 뜻하는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로 이혼이 급증하고 있다. 가정에서도 개인주의가 팽배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도쿄대 대학원 핫토리 다미오(服部民夫.인문사회)교수는 "개인주의로 가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망각하고 있는 게 문제"라며 "심지어는 한 가정에서 부모.자식으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저버리고 자신만 챙기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오대영, 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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