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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盤上)의 향기] “내기 바둑 두지 마라, 잔 수 신경 쓰다 바둑 망가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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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호 26면

영화 ‘신의 한 수’(2014년)의 한 장면. 단 한 번이라도 지면 목숨까지 앗아버리는 내기바둑의 세계. 악명 높은 살수(이범수·오른쪽)와 프로 바둑기사 태석(정우성)의 한판 승부가 벌어진다.

고려 가사에 ‘예성강곡’이 있었다 한다. 유래만 전한다. 하두강(賀頭綱)이라는 당나라의 상인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바둑 고수였다. 그가 예성강에 이르러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다. 고려인으로 남편은 바둑을 좋아했다. 그래, 그 남편과 내기바둑을 두어 거짓으로 몇 판을 졌다. 그러곤 거는 물건을 갑절로 하였더니 남편은 아내를 걸었다. 두강이 단판에 이겨 부인을 배에 싣고 떠나 버리니, 남편이 한탄하여 노래를 지었다. 그것이 ‘예성강곡’ 전편이다. 배가 바다에 이르자 빙빙 돌면서 나아가지 않기에 점을 쳤다. “절부(節婦)가 있다. 돌려보내지 않으면 배가 부서질 것”이라 했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두강에게 권해서 돌려보냈다. 부인이 노래를 불렀으니 그것이 후편이다.

승부 세계의 유혹

노국수들 내기 아니면 바둑 거부
『방랑기객』은 내기바둑꾼의 일생을 그린 에자키 마사노리(江崎誠致)의 소설로 1973~75년 월간 『바둑』에 실려 인기를 크게 끌었다. 프로 지망생이었던 주인공 하다 겐스케(旗謙介)가 내기꾼의 농간으로 내기바둑에 휘말린 후 파문당해 창백한 청년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뒷날 내기꾼과 만나 이겨내지만, 이미 자신도 어두운 세계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안타깝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다. 한국의 60~70년대 어려운 시절에 내기는 많았고 실제 내기 바둑의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토로한 프로도 있다.

기보 백1이 바둑스토리에 나타난 멋진 장문. 다음 흑A는 백B, 흑C, 백D까지 흑이 나쁘다.

 70년대 중반 아마 3단의 실력이 짱짱한 만화가 강철수는 『바둑스토리』에서 미모의 바둑꾼 유수현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아버지와 남편을 내기바둑으로 잃은 유수현이 내기의 세계로 들어가서 보여주는 내기바둑의 세계. 등장한 기보가 많았는데 모두 명인급 바둑에서 채취한 것이라 실감이 났다. 기보를 보자. 유수현이 둔 백1은, 사실은 우칭위안(吳淸源)의 포석 강의에서 나온 실전이다.

 구한말 국수 노사초의 집문서 잡히기는 유명했다. 스물일곱 번이나 집문서를 잡혔다. 당시 노국수들은 내기바둑 아니면 바둑을 두지 않았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 점이면 천하에 누구와 두어도 이긴다던 시미야 요네조(四宮米藏)는 악명 높았다. 1801~30년 각처를 떠돌아다니며 하수들을 골탕 먹였다. 한창 때는 3000냥을 벌었다. 물경 쌀 3300석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그는 명인 조와(丈和)에게 2점을 놓고 4승 6패 1빅을 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아와지(淡路) 쓰나초(津名町) 오마치(大町)의 작은 절 센주안(千樹庵) 뜨락 전망 좋은 곳에 3m 가까운 당당한 비석도 남아 있다. 묘비에는 ‘바둑의 신선 요네조의 묘(碁仙米欌之墓)’라는 훌륭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 쓴 이는 16세(世) 이노우에 인세키(井上因碩)다. 내기꾼이지만 만만찮았고 또 인연도 여럿 있었던가 싶다.

크게 먹기 위해 몇 년 공들이는 내기꾼
내기는 판단하기 어려운 사회 현상이다. 나쁘다고만 질타하면 어리석고, 기도(棋道)를 못 배웠다고 보면 단조롭다. 젊을 때엔 한 번쯤 들어가고픈 세계이기도 했다. 놀이의 세계는 우연과 사건의 세계. 사건을 만들 여지가 있으면, 그리고 그것이 우연을 가장할 수 있다면 놀이는 변한다.

  사건과 우연은 어디서나 뒤섞인다. 주술가들은 꼼수를 약간 쓰곤 하는데, 그들은 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공물(供物)은 신과 인간의 연속성을 찾으려는 행동. 주술가들이 신과 인간 사이에서 개입하고픈 것은 자연스럽다. 기도(祈禱) 자체가 그런 거 아닌가.

 사람들은 바둑 자체의 흥미를 추구하지만 때로는 외적 보상도 바란다. 기원에서 짜장면 내기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물론 그 정도 갖고 보상이라 하기는 좀 그렇지만 말이다. 적게 걸어도 방내기(집 차에 비례해 금액을 높이는 대국)는 큰 내기다. 예전엔 일반 기원에도 일종의 하우스가 있곤 했다. 뒤 쪽방이다. 그 방에서 카드나 마작을 했고 내기바둑도 두었다.

 내기는 큰 노력을 요한다. 오래 전 학원장이 내기바둑으로 수억 원을 잃었다는 신문기사가 있었다. 그런데 뒷날 들어보니 그 내기꾼이 학원장의 돈을 노리고 몇 년 공을 들였다고 했다. 만나서 술도 먹고 골프도 정답게 치고….

 화투 도박의 세계를 잠깐 들여다보자. 내기꾼들은 멀리 내다본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파는 화투를 자기들이 아는 공장의 화투로 바꾸기 위해서 한 걸음 한 걸음 공을 들인다. 따더라도 자기가 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밀어준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다. 크게 먹기 위해서 수 년 간 노력을 쏟는 것이다.

 70년대 유명한 내기바둑꾼으로 이필묵이 있었다.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당부했다. “너희들은 내기바둑 두지 마라. 자잘한 잔 수에 신경을 쓰게 되어 안목이 좁아진다. 바둑 다 버린다.” 고마운 말씀.

 내기바둑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세계다. 승부에서는 치수와 기백이 중요한데 내기에서 유리한 치수와 기백을 동시에 갖기는 힘들다. 유리한 입장을 가지려 들면 기백 갖기는 힘들다. 기백만 갖고 치수를 조정 못하면 이기기는 힘들다.

한국 바둑계, 80년 대 들어 내기 줄어
60년대 조남철이 쓴 책 중 하나가 『속임수』였다. 이름이 좀 그런데, 내용은 정석의 뒤안길을 밝힌 것이다. 정석은 수순 중 한 수만 바꾸어도 하수는 당하기 쉽다. 책의 이름을 속임수로 할 정도니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속임수에 당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반상에는 속임수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속이려는 마음이야 있겠지만, 몰라서 당하는 것도 현실이다.

 일본은 1924년 일본기원이 탄생하고 바둑의 정체성을 기예(技藝)로 세운 다음에도 내기바둑은 근절되지 않았다. 어릴 적 내기바둑을 두곤 했던 사카타 에이오(坂田榮男) 9단은 45년 전후(戰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내기가 줄어들었다고 회고했다.

 한국에서 60~70년대에는 내기가 많았다. 하지만 80년대 들어와서는 내기가 확실히 줄어들고 90년대는 더욱 줄어들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한국과 일본에서 내기가 많이 사라졌을까.

 내기의 성행과 근절은 가까운 현상이다. 설명의 뿌리는 같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내기가 많이 사라진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기원이라는 법인의 설립과 정체성의 확립. 또 하나는 실력의 편차가 줄어든 것.

 먼저 법인의 효과를 보자. 법인으로서의 한국기원은 단급 체계를 정비하는 게 일이다. 단급 체계가 널리 정해지면 애기가들은 자신의 실력을 알고 자신에 대한 통찰이 생긴다. 통찰이 생기면 함부로 뛰어들지 않는다.

 인간 내면의 위험을 관리하는 것으로 잘 발달된 것은 종교와 도덕이다. 자긍심은 그 수단. 바둑에서도 그렇다. 한국 바둑을 일으킨 조남철은 프로기사의 제도화와 정체성 확립에 주력했다. 기원은 애기가들에게 신뢰를 주어야 했고, 기사가 자신을 직업인으로 본다면 할 수 없는 게 내기였다. 기원의 설립과 프로제도가 내기의 근절에 미친 영향을 알 수 있다.

 제도화는 인물도 기른다. 제도화 과정에서 도덕적 기준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국 바둑의 뿌리로 김탁(김수장 9단의 선친)을 들 수 있는데, 그의 필치는 직절(直截)했다. “아무개는 마작이 몇 단” “누구는 대국 태도가 불량하다” 하는 글을 가감 없이 썼다. 바둑의 품격을 높였다.

 다른 요인도 보자. 이건 야구에서 왜 4할 타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까, 하는 문제를 다룬 수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풀하우스(Full House)』(2002)가 답을 준다. 과거엔 야구선수들의 실력 차가 많이 났기에, 즉 편차가 컸기에 4할 타자가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고 정보가 많아져 실력의 편차가 줄어들면서는 4할 타자가 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바둑도 그렇다. 너와 나의 실력 차가 크다면 상대를 속이긴 쉽다. 바로 그것이다. 내기는 편차, 즉 사회의 성장과 수준에 달린 문제다. 요즘엔 실력 좋은 아마추어도 많고 인터넷도 발전했다. 정보가 훤하다. 속이고 도망가려 해도 만만찮다.

 많은 사람들이 내기의 세계엔 프로도 못 당하는 아마추어 강자가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앞서 내기꾼 시미야를 말했지만 조와에게 2점을 놓아야 했다. 실력이 하늘과 땅 차이다. 만약 내기를 한다면 누가 제1인자일까. 현재 프로바둑의 1인자가 제1인자다. 정통으로 배운 바둑이 제일 무섭다.

가벼운 내기 바둑엔 긍정적 측면도
지금도 내기는 있을 것 같다. 없을 수야 없다. 가벼운 내기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고대에 공동체는 잔치가 중요했다. 음식을 나눠먹지 않고서는 공동체가 유지되는 게 불가능하다. 그와 같다. 기원에서도 바둑만으로는 싱거울 때가 있다. 약간 걸어 술자리라도 마련하면 즐거움은 배가된다.

 이야기 하나만 하고 끝내자. 이석홍(李錫泓·1897~1975)은 ‘방내기’계에서는 소문난 명수였다. 어느 날 대마가 죽어 만방 질 판이었다. 젊은이를 상대로 밤샘을 해 눈이 가물가물했다. 꾸벅꾸벅 조는 시늉을 했다. ‘저기 쌍립만 끊으면 대마가 기사회생할 것 아닌가.’ 잡았던 흑돌 하나를 백이 둘 차례에 조는 시늉을 하면서 흑의 쌍립 사이에 슬그머니 놓았다. 상대도 객기가 있었던지 딴전을 부리면서 다른 곳에 두었다. 그래, 백 차례가 되었다.

 곁에 구경하던 노인을 쳐다보며 말하기를 “내가 아까 어디 뒀더라….” “저어기, 흑돌을 놓습디다.” 증인마저 생겼겠다. 이 국수는 상대를 보고 호통치기를 “고약한 사람이로군. 늙은이가 백돌인 줄 잘못 알았으면 가르쳐줄 일이지, 시치미를 떼다니.” 먼저 놓았던 흑돌을 백돌로 바꿔 놓고는 쌍립을 끊었다. 승패가 바뀌었다.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주역의 발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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