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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과 싸우기, 여론을 위해 싸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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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한 달 전 미국 워싱턴에 부임한 첫날 휴대전화 하나 개설하는 데 장장 6시간이 걸렸다.

 배달에 3일 걸린다던 가재도구 하나는 결국 3주 만인 지난주에 도착했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매뉴얼 국가’ 일본에서의 주재 경험 때문에 기다리는 데는 제법 단련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하여간 하루하루가 끈기와의 싸움이다.

 하지만 같은 기다림에도 차이가 있다. 일본에선 안 되는 건 안 된다. 겉으로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뭐라 송구스러운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란 말을 연발한다. 그러나 이는 “어차피 안 되는 일이니 빨리 포기해”란 말임을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런데 미국은 거꾸로다. 일단 겉으로 미안해하는 게 없다. 식당에 가도 매장에 가도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분간을 할 수 없다. 가끔 어이가 없을 정도다. 시스템의 엉성함 때문인지 문화의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뭘 하든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일단 문제를 푸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기다리고 버티면 대부분 된다.

 정치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일본 자위대의 군사 활동 영역을 사실상 전 세계로 확대하는 안보법제가 16일 중의원을 통과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60~80%가량이 반대해도 소용이 없다. “여론의 이해를 얻어 나가겠다”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였지만 그 발언의 정확한 해석과 본심은 16일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내뱉은 “신문 같은 거 보고 있으면 여론을 잘못 알게 된다”는 말에 담겨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여론은 그저 잡음에 불과할 뿐이다. 강행 처리를 위한 절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타협의 지혜도 나올 리 없다.

 목발을 짚고 보름 넘게 오스트리아에 머물며 이란과의 핵협상을 진두지휘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모습에서 이와 대조적 모습을 본다. 이란 핵협상의 결과는 타협의 산물이었다. 세 차례나 협상 시한을 넘겨 가며 시간은 끌었지만 “접점을 찾아야 한다”는 여론에 부응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이 결국 합의안을 도출하게 만들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미 공화당은 이를 반대하고 있다지만 평화적 방법으로 대화를 통해 국제사회의 현안을 해결하는 노력은 미국의 저력을 느끼게 한다. 최근 급등한 오바마에 대한 지지도가 이를 보여준다. 독일의 노벨문학상 작가 토마스 만의 “여론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여론은 지속될 수 없다”는 말을 곱씹게 된다. 여론과 싸우는 일본과 여론을 위해 싸우는 미국의 차이다.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승민 사태를 마무리하고 청와대와 여당이 다시 관계를 복원하는 저차원적 이야기가 국민이 원하는 여론은 아닐 게다. 오바마처럼 노래를 부르진 않더라도 뭔가 “아, 우리가 함께 느끼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구나”란 걸 느끼고 싶은 소박하지만 진정한 여론을 담아낼, 여론을 위해 싸우는 지도자의 역량이 아쉬울 뿐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