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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스마트TV 만들고, 밤엔 더 나은 세상 빚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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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북한에 피자 제조법 영상을 공급한 김황. 낮에는 필립스 디자이너로 일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낮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필립스 본사의 수석 디자이너, 스마트TV를 만든다. 밤에는 스튜디오 황김 대표, 자신만의 디자인을 한다. 필요를 창출하는 소비의 첨병, 가장 팬시한 디자인 제품을 만드는 것으로 돈을 번다. 그리고 소비가 끝난 자리, 세상의 미래를 고민하며 비디오를 제작하고 퍼포먼스를 기획하는 데 돈을 쓴다. 디자이너 김황(35)의 이중생활이다. 광주디자인센터에서 진행한 워크숍 참석차 한국에 온 김씨를 만났다.

 ‘목란비데오’, 화면에 고전적 로고가 뜬다. 동그란 얼굴의 아가씨가 나와 인사한다. “안녕하십네까, 반갑습네다. 평양의 별무리 식당에 가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위대하신 장군님의 은혜로 우리도 피자를 먹게 됐습니다.” 비디오는 집에서 피자를 만드는 법을 보여준다. 북한 기득권자들은 누리지만 일반 인민들은 접하지 못하는 각종 외국 문화를 간접 체험하게 하는 부드러운 풍자 코미디 영화다. 제목은 ‘모두를 위한 피자’. 김황의 런던 왕립예술학교(RCA) 졸업 작품이다. “디자인이란 결국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것”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2011년 ‘페스티벌 봄’, 2013년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에서 발표됐으며, 올 초 프랑스 생테티엔 디자인 비엔날레에도 출품됐다.

사람의 동력으로 불이 켜지는 ‘피라미드 전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08년 12월 북한에 처음으로 피자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다는 뉴스를 봤다. 고위층만이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반 주민들도 피자를 만들어 먹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제작했다.” 서울서 배우를 고용해 촬영했고, 탈북자들의 감수를 거쳤다. 2000만원 제작비는 자비로 충당했다. 500장의 CD는 단둥·연길서 밀수꾼들을 통해 배포했다. 이후 북에서 반응이 답지했다. 북한 암시장 상인은 중국 공급업자에게 “다음 번에는 남조선 드라마 중에 최근 걸로 가지고 오쇼. 이제는 ‘황산벌’이나 ‘왕의 남자’는 너무 많이 봐서 아니 팔립니다”라고 편지했다.

 김황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다. 어머니는 시인, 중학교 때 부모가 준 도서목록을 지금껏 채워 나가고 있다. 『월든』이나 『공산당 선언』 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홍익대 금속조형디자인과 졸업 작품은 ‘코쿤-노숙자를 위한 이동식 침낭’이다. 종이 상자를 접으면 울룩불룩 번데기형 침낭으로 변신, 풍찬노숙할지언정 독립 공간을 가질 수 있다. 번데기를 찢고 나비가 되라는 희망을 담았다. 레버를 돌려 전기를 생산해야 불이 켜지는 ‘피라미드 전구’는 환경 보호 캠페인 소품이 아니다. 화석 연료, 시장 경제 등 기존의 시스템에 우리가 너무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후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살아갈지 질문을 던지는 디자인이다. “기술의 발전에 인류가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기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코쿤-노숙자를 위한 이동식 침낭’.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일반적인 제품 디자인과는 범주가 다르다.

 “광고 등 자본주의의 꼭대기에 있다고 할 수 있는 TV를 디자인하면서, 동시에 반상업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 스스로도 모순이라고 느낀다. 양자택일하지 않고 둘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할 수 없을까 고민한다.”

 - 정체가 뭔가. 공연기획자, 사회운동가인가.

 “전통적 굴레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새로운 것을 제안하고, 그것이 사회에 기여하고 변화를 일으키길 원한다. 기존의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결국은 과거와 똑같은 걸 하게 될지도 모른다.”

글=권근영 기자, 송락규 인턴기자 young@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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