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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 감독의 ‘나의 절친 악당들’을 보는 두 가지 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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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임상수 감독의 ‘나의 절친 악당들’을 보는 두 가지 시선

[비평]형편없는 현실을 넘어서는 판타지

자본에 대한 통쾌한 도발인가, 아니면 허무한 조롱인가. ‘나의 절친 악당들’(6월 25일 개봉, 임상수 감독)을 두고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영화는 정체불명 회사의 인턴사원 지누(류승범)와 견인 트럭 운전사 나미(고준희)가 우연히 돈가방을 손에 넣으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을 다룬다. ‘하녀’(2010) ‘돈의 맛’(2012)까지 근래 작품에서 임 감독이 선보인 경제 특권층에 대한 비판 의식이 판타지 요소와 함께 담겼다. ‘나의 절친 악당들’과 임 감독을 각기 다른 시선으로 본 영화평론가 강유정과 박우성의 견해를 들어본다.

임 감독과의 첫 만남은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였다. 생각해 보자.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보려고 욕실에서 거울을 보다 넘어져 다리가 부러진 여자, 고행하듯 성(性)의 독립성에 대해 고민하는 여자. 이런 여자들이 실제 있기는 할까.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실제 여자를 재현하기보다, 그런 고민이 가능하다는 개연성의 측면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말하자면, 임 감독은 현실을 거울에 비추듯 고스란히 그려내는 전통적 사실주의자가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를 그로테스크하게 변형하는 모더니스트에 가깝다. 딱 그런 사건, 그런 사람은 없지만 임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럴 듯하고, 그럴 만하다.

<기이하고 낯선 이미지>

‘바람난 가족’(2003)에 등장하는 인물만 해도 그렇다. 가령 호정(문소리)은 옷을 모두 벗은 채 불 꺼진 거실에서 요가를 한다. 이 장면은 사실적이라기보다 전위적이며 상징적이다. 호정의 시아버지(김인문)가 병실에서 피 토하는 장면도 기이하다. 미학 이론 중 ‘낯설게 하기’로 불리는 기법이 바로 이런 장면을 통해 나타난다. 관객은 이 때문에 스크린이라는 제4의 벽에 무조건 몰입하지 않고 거리를 두게 된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이는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Punctum, 사진을 감상할 때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받아들이는 것)과도 닮아 있다. 임 감독이 펼친 기이한 장면이 영화 서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쩐지 날카로운 조각으로 남아 뇌수를 콕콕 찌르는 것이다.

‘하녀’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의 생일 파티도 그렇고, ‘돈의 맛’에서 갑자기 눈을 뜨는 시체도 그렇다. 그건 논리적 해석의 영역을 벗어나지만 논리를 넘어 기억을 계속 간지른다. 임 감독은 세상을 편안히 볼 수 없게 한다. 그게 임 감독의 매력이자 그의 영화가 가진 힘이기도 하다.

‘나의 절친 악당들’의 첫 장면도 그렇다. 등장인물은 죄다 커다랗고 탐스러운 사과를 한 입씩 베어 먹고 있다. 도대체 왜 사과란 말인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이상한 행동은 비상하게 눈길을 끈다. 회장(김주혁)이 그의 미끈한 몸만큼이나 유창하게 쏟아내는 욕설도 마찬가지다. 어울리지 않고 삐걱거리는 상황과 이미지가 충돌한다. 이 불편함 가운데 이야기는 앞으로 나간다.

<허황된 상상과 유쾌한 도발의 힘>

어떤 점에서 ‘나의 절친 악당들’은 임 감독 영화 중에 가장 착하고, 친절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판타지와 영화적 환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효용 중 하나가 바로 판타지다. 다만 판타지에도 질이 있고, 급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변호인’(2013, 양우석 감독)의 송우석(송강호)이 헌법의 기본을 외칠 때, 우리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의로움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이미 기본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반사경이며, 그럼에도 그러한 기본을 갈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지다.

‘나의 절친 악당들’에서 보여주는 판타지도 여기에 맞닿아 있다. 지누와 나미의 현실은 형편없다. 고작 고시원 방 한 칸을 차지하고, 학자금 대출도 갚지 못한 지누. 그는 정직원이 되기 위해 온갖 굴욕을 참아야 한다. 나미의 형편도 다를 바 없다.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지만, 한쪽 팔을 잃고 불법 체류자가 된 야쿠부(샘 오취리)의 신세는 더 처량하다. 그런데 그들 앞에 거액의 돈이 떨어진다. 돈을 잃어버린 사람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할 수 없는 검은 돈. 누군가에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돈이 이 가난한 청춘 앞에 떨어진 것이다.

대개 이런 경우 돈가방을 발견한 사람들끼리 다투고 배신하다 모든 걸 잃고 만다. 하지만 임 감독은 다르다. 애초에 거액의 돈가방을 발견하는 게 판타지라면 더 급진적으로 환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믿는다. 가난한 그들은 서로 연대해 자기 몫을 공평하게 나눠 갖는다. 임 감독의 영화에서는 약한 사람들끼리의 연대를 목격하기 어렵지 않다. 적어도 어두운 범죄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최소한의 윤리와 도덕, 약속이 존재한다. 재벌 혹은 권력자와 달리 기본을 아는 지누와 나미, 야쿠부는 이상적 판타지를 누려 마땅한 주체가 된다.

마셰티(아프리카에서 풀을 헤치는 데 쓰는 대형 칼)를 휘두르며 작렬하는 폭력은 그런 의미에서 유쾌한 만화적 상상력이자 복수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룹 장기하와 얼굴들이 등장해 주인공들과 즐겁게 파티를 벌이는 마지막 장면 역시,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이 무척이나 순수한 의미의 판타지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뭐 어떻단 말인가. ‘3포 세대’라고 영화 속에서조차 가진 자들에게 철저히 유린당해야 하나. 그들이 지닌 부도덕의 틈새에서 간혹 승리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현실을 반영하는 것만이 윤리는 아니다. 판타지이면서 아닌 척하는 위선도 없다. 때로는 허황된 상상과 유쾌한 도발이 힘이 된다. ‘나의 절친 악당들’이 그렇다.

글=강유정 영화평론가

[비평]본질을 잃고 과격해진, 헛헛한 조롱

자본에 대한 통쾌한 도발인가, 아니면 허무한 조롱인가. ‘나의 절친 악당들’(6월 25일 개봉, 임상수 감독)을 두고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영화는 정체불명 회사의 인턴사원 지누(류승범)와 견인 트럭 운전사 나미(고준희)가 우연히 돈가방을 손에 넣으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을 다룬다. ‘하녀’(2010) ‘돈의 맛’(2012)까지 근래 작품에서 임 감독이 선보인 경제 특권층에 대한 비판 의식이 판타지 요소와 함께 담겼다. ‘나의 절친 악당들’과 임 감독을 각기 다른 시선으로 본 영화평론가 강유정과 박우성의 견해를 들어본다.

임 감독은 ‘하녀’와 ‘돈의 맛’ 그리고 ‘나의 절친 악당들’에서 초특급 부자를 스크린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캐릭터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노골적으로 전시되는 다양한 공간, 그곳을 가득 채운 과시적인 장식, 허세와 변태적 성욕 따위로도 존재를 드러낸다. 카메라는 초호화 저택의 내부 공간을 정밀하게 훑는 동시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상류층의 속물 근성과 위선을 에두르지 않고 드러내는 것. 바로 임 감독이 돈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다. 그것은 자본을 향한 거침없는 조롱이다.

<개연성 부족한 사회 약자들의 연대>

‘하녀’는 자본을 향한 절박한 저항을 자살 소동 수준으로 끌어내려 허무감을 안겼다. 하지만 권선징악이라는 쉬운 출구로 도망치는 대신, 가난한 자들의 내부에 존재하는 적대적 상황이나 어리석음을 들추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관객에게 자본의 모순을 새로운 시선으로 응시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돈의 맛’은 계급 대결보다 부자의 위선을 폭로하는 쪽으로 무게의 추를 옮긴 경우다. ‘하녀’의 부자들은 외양의 품격을 유지했지만, ‘돈의 맛’의 부자들은 노골적으로 간음하고, 망설임 없이 배신하며,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살인한다. 그들의 속살은 실상 막장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임 감독은 이때부터 조롱의 시선에 균형을 잃은 듯하다. 야만의 프레임으로 부자들을 포장하며 이들을 우리와 상관없는, 예외적이고 신기한 괴물로 만들었다. 극 중 부자들은 흥미로운 관음의 대상이 될지언정, 진지한 사유의 대상으로 부각되지 못한다. 카메라는 노골적으로 거대한 산처럼 쌓여 있는 신권 지폐를 유유히 훑거나, 유럽풍 대리석과 벽난로를 미끄러지듯 보듬고, 포르노의 날선 이미지를 시크하게 관찰한다. 이것은 반(反) 자본이라는 이 영화의 기조와 달리 자본의 축조물에 대한 탐미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돈의 맛’에도 부자에 저항하는 사람들, 즉 돈의 유혹을 끝까지 버텨낸 주영작(김강우)과 자신이 속한 부유층에 염증을 느낀 윤나미(김효진)의 연대가 존재한다. 임 감독은 그 연대의 가능성을 판타지로 급하게 마무리한 것이 못내 아쉬웠나 보다. ‘나의 절친 악당들’은 미완결의 연대를 전면적으로 내세웠다. 이 영화에선 비정규직(지누), 재개발 피해자(나미), 불법 이주 노동자(야쿠부)가 하나로 묶인다. 우연히 돈가방을 발견하고 일확천금을 얻기 위해 연대하게 된 이들은 돈가방 주인과의 악전고투 상황에 내몰린다.

문제는 가난한 자들의 연대가 영화의 내적 논리가 아닌, 영화 밖의 대의나 부자의 선정적 이미지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연대의 과정이 헐겁다. 그들은 특별한 계기 없이 섹스한 뒤 급격히 사랑에 빠지고, 기다렸다는 듯 외국인 노동자를 동정한다. 게다가 구하기 어렵다는 권총도 간단히 손에 넣는다. 이때 임 감독 특유의 비아냥거림은 성찰의 계기가 아니라 숏의 논리적 공백을 억지로 봉합하기 위해 동원된다.

<쾌감으로 변질된 조롱>

‘나의 절친 악당들’에도 비중은 약하지만 존재감만큼은 확실한 초특급 부자 회장이 등장한다. 임 감독의 영화에 등장했던 부자들의 부정적 겉모습을 고스란히 승계한 그는, 말끝마다 욕설을 내뱉고 변태적 성애를 드러낸다.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말 그대로 탕아다. 여하튼 부자는 천하의 나쁜 놈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일단은 뭉쳐야 한다는 무모한 상황 논리가 끼어들고, 동시에 연대의 내밀한 절차는 간단히 생략된다. 부자의 악랄함은 맥락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연대를 위해 처음부터 탕아의 이미지로 딱딱하게 굳어 있다. 이렇게 단순하게 극화된 대결 구도 안에서 조롱은 그저 감각적 쾌감으로 변질된다. 자본의 위력은 선정적 이미지 아래 무뎌지고 추상화된다. 남은 것은 피상적이고 감정적인 도덕적 비난이나 피비린내 풍기는 과격한 복수뿐이다. 사회적 풍자를 위한 조롱과 그것을 드러내는 영화적 조롱은 구별돼야 한다. 쿨한 장난이 극화 과정에서 아슬아슬하게 환기되는 것과 소모적인 숏으로 직접 보여주고 과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범주다. 돈에 관한 연작이 이어지는 사이, 자본에 대한 임 감독의 태도는 점점 더 가벼워졌고, 그것을 재현하는 영화적 태도는 점점 더 과격해졌다. ‘나의 절친 악당들’을 보며 통쾌함을 만끽하기보다 피로감을 느낀 것은 자본에 대한 도발을 이미지의 과격함으로 눙쳐 버리기엔 한국 사회의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헛헛한 조롱이다.

글=박우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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