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빚내 복지잔치 파산한 그리스 “긴축 수용 못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우리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줬다. 우리가 찬성한다면 (채권단이) 계속 지배할 것이다. 이젠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게 됐다.”

 5일 밤 그리스 아테네의 신타그마광장에서 만난 베리(27)란 청년은 연신 웃었다. “앞으로 최소 1~2년은 어려울 것이란 건 안다. 그래도 우리 나름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도 했다. 여행사를 한다는 타나시스 라스카로(42)는 “첫발을 떼는 날”이라고 했다.

 광장은 축제 그 자체였다.

 이날 유럽연합(EU)·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 등 채권단의 긴축안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 이후 풍경이다. 반대가 61.3%로, 찬성을 22.6%포인트 앞섰다. 선거 전후 1~3%포인트 내외의 초박빙 승부가 될 것이란 예상과 크게 달랐다.

 그리스 국민의 메시지는 명료했다. ‘절대 긴축은 못한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TV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는 협박당하지 않는다”며 “국민이 용감한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은 유로존 내에서의 협상이다. 지속가능한 해법을 찾겠다”고 발언했다.

 그리스 내에선 채권단의 5년여간 잘못된 처방으로 경제가 쪼그라들었다는 원망이 강하다. 실제 2009년 2640억 달러이던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이 지난해 1994억 달러로 25% 이상 줄었다. 그사이 청년 실업률은 50%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이건 그리스만의 내러티브일 뿐이다. 그리스 밖의 시선은 다르다. “포퓰리즘으로 흥청망청하다 이젠 빚까지 탕감해 달라느냐”는 냉소가 가득하다. 자업자득인데 적반하장으로 나온다는 얘기다. 그리스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부유했다. 81년 사회당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집권하면서 “국민이 원하는 건 다 줄 것”이라고 공언했다. 연금 인상과 의료혜택 확대 등 포퓰리즘이 본격화됐다. 그리스 정부는 공공부문을 비대화해 고용을 늘렸다.

현재 그리스 직장인 중 25%(85만 명)가 공무원이다. 이들은 ‘황제 복지’를 누리곤 했다. 58세면 퇴직하고 연금으로 재직 때 월급의 98%를 받았다. 2010년 유로위기가 닥친 후 연금을 일부 깎았지만 공무원들이 반발해 채권단의 요구에는 크게 못 미쳤다(95%).

 2001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 가입하면서 ‘돈벼락’을 맞았지만 사회간접자본 확충 등에 쓰지 않고 복지를 확충하는 데 대부분 썼다. 그사이 국가채무비율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177%까지 상승했다.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요즘 아테네에선 지하철을 공짜로 탄다. 한동안 인터넷 데이터 사용료도 무료였다. “매일 60유로만 찾을 수 있는 자본통제 중”이란 이유에서다. 한 청년은 “국가부도 위기에 한심한 일”이라고 개탄했다.

 부패도 만연했다. 그리스의 탈세액은 연 2000억∼3000억 유로(약 250조~373조원)로, 2009년 재정적자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해운업으로 부를 일군 그리스 부자들은 세금을 피하려 사업 등록지를 다른 나라로 옮겼다.

그리스의 투표 결과에 대해 지그마어 가브리엘 독일 부총리 겸 경제장관은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반대가 나왔다고 나머지 유럽국들이 그것을 따라야 하느냐”며 “그리스가 협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다리마저 태워버렸다”고 분개했다. 중도 진보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은 “그리스 시리자 정권 지지자들이 국민투표 결과를 자축했으나 희망의 빛은 찾을 수 없다. 며칠 안에 그리스인들은 음울한 처지가 될 것”이라고도 보도했다.

 보수지 디벨트는 “무엇보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긴급하게 현실 진단을 해야 할 것”이라면서 “시간이 많지 않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며칠 안에 그리스는 돈이 마를 것이고 그러면 경제 피폐와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이탈)는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이제 그리스의 입장은 분명해졌다. 유럽 지도자들이 선택할 때다. 영국의 가디언은 이날 “그리스 부채 탕감이냐, 아니면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이냐의 두 가지 선택만 남았다”고 했다. 일단 그리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채권단을 향해 “테러하고 있다”는 식의 언사를 일삼던 논쟁적 인물인 야니스 바루파키스 재무장관의 사임을 수용한 것이다. 바루파키스 장관은 자신의 블로그에 “내가 유로존 일부 재무장관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치프라스 총리가 국제채권단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 사임한다”는 글을 올렸다.

 EU 지도자들 중에서 협상론자인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6일 강경론자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만났다. 7일엔 유로존 재무장관들과 유로존 정상회의도 열린다. 그리스나 유럽엔 절체절명의 48시간이다.

아테네=고정애 특파원, 서울=하현옥 기자
ockha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