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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오디세이] 돌 하나 빠져서 기우는 장군총 … 고은 “죽음의 권력이다” 탄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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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어느 쪽이 북한인가요?” 압록강변에서도, 북한 자강도 만포시의 맞은편 지안(集安)에서도 이인호 KBS 이사장은 북이 어디인가 물었다. ‘평화 오디세이 2015’ 순례길에서 가장 많이 나온 질문이기도 하다. 국경 지역에서 내 혈육이 살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 묻는 일은 모국에 대한 끌림이다. 갈 수 없는 형제의 땅에 눈길 한 번 더 주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중국 동포 안내인 김진환씨는 쉽게 설명했다. “낮에는 나무가 없는 민둥산 쪽이고요, 밤에는 불 꺼진 캄캄한 쪽입니다.” 북쪽 방향을 더듬다 헐벗은 산하를 맞닥뜨리는 오디세이 일행의 얼굴에 짠한 기색이 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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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4일 오전, 퉁화(通化)에서 지안으로 가는 여정은 ‘우리 땅’에 들어서는 흥분으로 일행을 설레게 했다. 강 건너 ‘어이’ 부르면 그 목소리 받아 ‘어이’ 돌아올 듯 가까운 곳에 북쪽 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이 75일 만에 ‘속도전’으로 지었다는 3~4층 아파트는 밝고 깨끗했지만 30도를 웃도는 강렬한 햇볕 아래서도 냉기가 돌았다. 만포 철교 너머로 목탄차 한 대가 연기를 피어 올리며 느릿느릿 달려간다. 한사코 사진을 못 찍게 막아서는 중국 공안(公安) 앞에서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본사 고문, 전 재무부 장관)은 “참, 야박하네” 한마디를 던졌다.

 지안으로 들어서는 큰 대문 위에는 ‘중국역사문화명성집안(中國歷史文化名城集安)’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담벼락에 붙여놓은 ‘고구려민속풍정(高句麗民俗風情)’이란 간판이 초라하다. 2004년 고구려 유적을 제 것인 양 세계유산에 등재한 중국 정부의 속내가 보인다. ‘동북공정(東北工程, ‘동북변강 역사와 현상계열 연구공정’의 줄임말. 중국이 2002년부터 중국의 동북 3성인 지린성·랴오닝성·헤이룽장성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민족과 역사를 중국 민족과 역사에 편입시키는 사업)’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도 우뚝한 ‘광개토대왕비’를 찾아가는 길이 숙연해진다.

 ‘호태왕비(好太王碑)’ 팻말이 보이자 고은 시인과 송민순(전 외교통상부 장관)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의 걸음이 빨라진다. 중국풍 정자 지붕을 돌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거대한 돌덩이 하나가 우뚝하다. 백두산에서 모셔온 6.39m 우람한 응회암(凝灰巖)에는 천수백 년 전 고구려 사람의 따뜻한 피가 흐르는 듯하다. 우리 민족의 손으로 세운 가장 오래된 돌비석 앞에서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멈춘다. 한 덩이 돌이건만 의기충천이다. 포효하는 한 마리 사자다. 광개토대왕의 웅혼한 뜻을 받잡아 각수(刻手)가 땀으로 새긴 1775자 한 자 한 자는 패기 넘친다. 호태왕 당시 고구려의 이름 높은 서예가가 썼을 그 강직한 글씨 앞에서 김종민 한국콘텐츠공제조합 이사장(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말했다. “고구려 미의 핵심은 힘이다.”

 이웃한 장군총(將軍塚) 들머리에 선 ‘고구려 28대왕 박람관’ 안내문은 이런 설명을 담고 있었다. “고구려는 조기 중국 북방의 소수 민족 정권입니다. (…) 고구려 이십팔대왕의 성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고구려를 격하하려는 의도 물씬한 글귀 탓에 심사가 불편했던 순례단은 곧 그 불쾌를 잊었다. 거석(巨石)이 홀연 시야를 꽉 채웠기 때문이다. 만주 대륙을 달리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듯 좁은 가슴이 뻥 뚫렸다. 엄청난 규모의 돌무덤을 지탱하려 받쳐놓은 고분석 하나가 사라진 곳은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고은 시인은 “죽음의 권력이다”며 탄식했다. 아득한 역사 저편에서 홀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그림자가 비친다.

 ‘오회분(五會墳)’은 북한 땅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유적지다. 5호묘 안으로 들어서니 땡볕에 달구어진 몸이 금세 서늘해진다. 돌로 된 큰 방이 있고 천장도 높다. 널방 돌에 그려진 인간사가 1600여 년 전 고구려로 순례객들을 순간이동 시킨다.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청룡 백호 뛰놀고, 조상 숨결 생생하다. 화공이 조금 전에 붓을 거두고 나간 듯 색감은 반드르르 빛난다. 생 돌 위에 바로 그린 화필은 고구려의 바람처럼 우리 몸을 감싸 돌았다. 남북이 각기 걸어온 길을 하나로 안아주는 고구려의 혼이다.

 무덤 밖으로 나오니 저 차디찬 석면(石面)이 들려주고 싶었을 말씀 한마디가 울린다. ‘고구려에는 휴전선이 없다.’ 남과 북 모두의 고향인 고구려 옛 땅에서 오디세이는 통일의 화법 하나를 찾았다.

중앙일보·JTBC 특별 취재단

단장: 이하경 논설주간
중앙일보: 이정민 정치·국제 에디터, 최형규 베이징총국장,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이훈범·강찬호 논설위원,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영교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 왕철 중국연구소 연구원
JTBC: 김창조 국장, 신득수 PD, 정용환 정치부 차장, 박영웅 카메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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