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핵심 비켜 간 정부의 R&D 혁신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김선영 기자 중앙일보
김선영
서울대 교수
바이로메드 최고전략책임자

정부는 지난달 13일 국가 예산이 투입되는 연구개발 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취지에서 ‘R&D 혁신안’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기업·대학·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역할 분담과 연구 주체 간 협업, 출연연 혁신, 중소·중견기업 지원, R&D 기획 및 관리체계 개선, 국가 차원에서의 컨트롤타워 설립 등이다. 모두 옳은 방향이다. 그러나 R&D 혁신은 연구 주체들의 변화에 앞서 힘을 갖고 있는 정부 내 유관부처들의 사고 전환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우려스럽다.

 먼저 우리나라의 정부 지원 R&D에서 왜 혁신이 필요한지를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과학기술은 1960년대 중반부터 정부 주도의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발전해 오다 경제성장으로 국가 재정에 여유가 생기면서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여러 부처들과 연구자들이 경쟁적으로 규모를 키워나가면서 정부의 R&D 예산은 2000년 4조원대에서 2015년에는 19조원으로 무려 5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를 통해 연구 논문과 특허의 숫자 등 계량적 지표들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경제발전 속도가 둔화되고, 정부가 재정 건전화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이제 R&D 예산이 과거와 같은 속도로 늘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다. 반면에 과학기술계의 양적 성장이 질적 발전을 뒷받침하지 못해 국가와 사회에 실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연구 성과는 미미했다. 즉 이제는 투자 대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거의 모든 수준에서 효율성을 높이는 시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현재 R&D 예산과 사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보면 우리나라의 문제점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여러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R&D 예산을 따기 위해 소위 전문가들을 앞세워 사업을 기획하고, 그중 ‘있어 보이는’ 것을 고르거나 청와대에서 보고하는 형식을 거쳐 기획재정부를 설득하고 국회 승인을 거친다. 부처 간의 상호 협의 과정도, 이를 조정해 줄 기관도 사실상 없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업의 경우 일부 과제가 종료돼 생기는 예산 여분에 대한 권한은 부처 공무원이 가진다. 이런 과정에서 기재부는 예산 배분권을 갖고 부처들을 통제하고, 각 부처들은 사업 기획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과 배당된 예산의 집행권으로 연구자들에게 막강한 ‘갑(甲)’이 된다.

 이런 과정이 십수 년 반복되다 보니 우리나라의 R&D는 큰 줄거리가 없다. 부처 혹은 사업 간 이전투구식 예산 투쟁으로 막대한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과거 정부에서 ‘과학기술혁신본부’나 ‘국가과학기술위원회’라는 장관급 조직을 만들었다가 혼란만 남기고 명확한 설명도 없이 사라졌다. 현재는 미래창조과학부의 ‘국가과학기술심의회’가 유사한 기능을 하지만 수많은 임의적 위원회로 구성된 이 조직은 전문성과 권한 등 모든 면에서 의문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번 혁신안은 미래부 내 3개국을 통합해 차관급이 수장인 ‘과학기술전략본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예산 조정 권한이 미약하고 예전보다 전문성이 향상된다는 보장도 없는 이 차관급 조직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할 것은 뻔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해답은 간단하다. 부처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기획하고 사업의 집행을 모니터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에서 국가적 차원의 R&D 청사진을 짜고, 이를 바탕으로 투자 우선순위를 정해 방향과 분야를 부처에 제시하고, 연구사업과 출연연의 운영은 최대한 연구 주체들에 맡겨야 한다. 예산 편성과 조정 권한을 가지는 이 조직은 정부구조상 대통령실 혹은 국무총리실에 설치돼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다른 문제들은 명실상부한 컨트롤타워가 만들어지면 중장기적으로 대처하거나 정책 전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들이다. 예를 들어 출연연을 독일의 프라운호퍼와 같은 기구로 만들어 중소·중견기업을 지원하려면 중앙부처에서 독립시켜야 한다. 그 기관장의 임기도 최소 5~10년으로 만들어 줘야 한다. 대학에서 성장동력형 연구를 촉진시키려면 성과지표를 하나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개선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최고 대학들은 ‘학문의 전당’ 역할은 물론 성장동력의 엔진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의 실용화 연구나 벤처 활동을 마치 외도(外道)처럼 간주한다. 실용적 연구가 교육이나 학술 연구와 동등한 수준으로 채용이나 승진의 평가지표로 채택된다면 대학은 빠르게 시장친화적 연구의 본산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공무원의 개입과 선도는 나름 의미가 있었다. 그동안 연구자들의 정부 예산에 대한 절대적 의존성, 전문성을 이용한 과대포장, 개인 및 기관 이기주의 등을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R&D의 다양화, 세분화, 전문화로 인해 기존 관 주도 방식에서 대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지금은 관이 먼저 혁신을 하고 나서 나머지 추진 방안을 내놔야 할 때다.

김선영 서울대 교수·바이로메드 최고전략책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