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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국산영화제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1923년 총독부 체신국에서는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되어 이 영화 제작을 「민중극단」 대표인 윤백남에게 위촉하였다. 윤백남은 이를 응낙하고 『월하의 맹서』라는 제목으로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은 다음 주연으로 권일청·이월화를 기용하고 「민중극단」의 연기진을 총동원하여 조선사람으로 처음 만드는 영화 『월하의 맹서를 제작, 완성하였다. 영화는 전국으로 순회상영되어 크게 호평을 받았고 윤백남이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국산영화였다.
이것을 계기로하여 부산에서 발족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 윤백남을 감독으로 초빙하였다. 이영화희사는 일본인 명출음일이 출자해 제1회 작품으로 『해의 비곡』을 제작, 1924년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는데 감독은 왕필렬이란 조선사람의 이름을 쓴 일본인 고사관장이었다. 제2회 작품부터는 조선사람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여 감독을 맡기려 하던 중 『월하의 맹서』에서 윤백남의 실력을 보고 그를 초빙한 것이었다. 1백50원이라는 비싼 월급을 주었다고 한다.
윤백남은 입사해서 제2회 작품으로 비극사화 『운영전』을 만들었다. 백남이 각본을 쓰고 감독하였는데, 주연으로 신인 김우연을 기용하였고 춘사 나운규는 이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1925년 1월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는데,성과가 좋지 않았다. 이로인하여 윤백남과 회사간부와의 불화가 생겨 드디어 윤백남은 퇴사를 결심하고 그를 따르는 이경손·주삼손·나운규·김우연을 데리고 서울로 을라와 을지로5가에 「윤백남프러덕션」이라는 새 영화회사를 창립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우리나라 사람의 영화회사였다.
윤백남은 새로운 영화제작에 착수하는 한편 연구생을 모집하여 신인을 양성하였는데, 여기서 전창근·정기탁등 많은 영화인이 나왔다.
그리고 윤백남은 제1회 작품으로 『심청전』을 선택하여 그 각색과 감독을 신인 이경손에게 맡겼다. 이경손은 현철이 창립한 예술학원을 수료한 유망한 신진이었다. 윤백남 자신은 제작과 기획을 맡았는데, 출연진은 나운규·이경손·김우연등이었다.
나운규는 『운영전』에서는 집군꾼이라는 단역이었는데, 이 사람을 주역인 심봉사역으로 발탁한 것은 윤백남의 혜안을 보여준 것이었다.
나운규는 이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어 명성을 얻었는데, 『심청전』 은 작품으로서는 높이 평가되었지만 흥행성적은 좋지 않았다.
윤백남은 제2회 작품으로 춘원이광수의 『개척자』를 선택하여 이경손과 자신이 각색을 맡고, 감독은 이경손에게 맡겼다. 그리고 『심청전』을 일본에 수출하기위하여 백남은 동경으로 떠났는데, 일이 여의치 않아 일본에 장기 체류하는 동안 서울에서는 경영난으로 『개척자』의 제작이 중단되고 이어서 「윤백남프러덕션」도 해산되고 『개척자』는 다른 회사인 「고려키네마회사」에 의해 완성되었다.
윤백남은 실의 속에서 귀국했는데, 이것으로 그의 영화인으로서의 활동은 끝났다.
이리하여 윤백남은 우리나라에있어서 영화운동의 개척자로서의 공격만 남기고 영화계를 떠나 대중소설가로 전향하였다.
그는 동아일보에 l928년부터 『신석 수호지』를 연재한 것을 비롯하여 『대도전』(1930), 『탐기루만화』(1930), 『해조곡』(1931), 『봉화』(1933),『흑두건』(1934), 『백련류전기』(1936) 등을 연재하여 대중소설의 제1인자가 되었다. 이동안에 JODK방송국을 통해 야담을 방송하여 야담계에서도 굉장한 인기를 끌어 1933년에는 경성방송국의 초대 제2방송과장으로 조선어방송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어떤 사정으로 서울을 떠나 만주로 들어가 해방후에 귀국하여 다시 영화인들의 추대를 받아 조선영화건설본부의 위원장이 되어 영화인으로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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