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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붓 버리고 색을 얻다, 도윤희의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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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화가 도윤희씨는 “추상화를 그리지만 매일 뉴스를 챙겨 본다. 추상은 몽상이 아니라 명징한 은유다”라고 말했다. [사진 갤러리현대]

“오래된 책을 넘길 때 나는 냄새, 큰 항아리 들여다볼 때 ‘우∼’ 하고 나는 소리, 낡은 장롱의 나무가 헌 흔적, 고목이 뜯어진 자리….”

 안개가, 먼지가, 연기가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듯한 추상화 앞에서 화가 도윤희(54)가 말했다. 무엇을 그렸느냐고 물은 참이었다.

 “주제는 내가 일부러 발견한다기보다는, 내 원인인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생겨진, 이런 생각을 해서 이런 사람이 된, 내 기질과도 같은 것 말이다”라고 덧붙였다.

 1985년 첫 개인전으로부터 30년이 지났다. “첫 전시에도 이런 모호한 것들을 다뤘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숨겨져 있는 것, 구석진 것, 낯선 것, 가려진 것, 들춰내는 것들이다.” 그동안 열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흑연을 긋고 또 그어 만든 검은 화면에선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미세한 느낌이 묻어났다.

이번에는 연필도, 붓도 버렸다. 대신 색을 얻었다. 손으로 물감을 찍어 문댔다.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 비가시적인 것을 시각예술인 회화로 구현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시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앞에 벌어지는 현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런 부분을 끄집어내 표현해 왔다. 현상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것, 작가가 하는 일이란 그런 것일 게다.”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조부는 백자에 꽂은 라일락 그림으로 이름난 도상봉(1902∼77) 화백. 김환기(1913∼74) 같은 화가뿐 아니라 문인·음악인들도 집에 드나들었다. 도자기를 하도 좋아해 호도 도천(陶泉)이었던 도 화백은 맏손녀를 무척 아꼈다. 부모님이 사는 명륜동 한옥 위채에 조부의 화실이 있었다. 그곳 마루에서 풍기는 오래된 성당 냄새에 유화 냄새가 섞이면 마음이 안정됐다. 고교 1학년 때 조부가 세상을 뜨자 집에서 설렁탕을 끓여 장례를 치렀다. 한참을 앓고 나서 숙명처럼 미대에 진학했고 그림을 그렸다. 80년대, 동료들은 하나둘 캔버스를 떠나 개념미술을 하고 설치미술을 했다.

“우리는 그림만 그린다는 게 촌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세대다. 여러 운동이 나오고, 물질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고, 개념을 중시하게 됐다. 그림을 그대로 그리는 게 구식 같이 느껴졌다. 나라고 다른 게 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놓지를 못하겠더라. 그렇게 그림만 그리다 보니, 평면 안에서 깊이를 찾다 보니, 내 나름의 그림에 대한 방식과 태도가 형성된 것 같다.”

 그의 이번 추상화에는 도상봉의 라일락이 얼비치는 느낌이다. “벗을 수 없는 가정사는 내게 천형이자 천복이다.” 도윤희 개인전 ‘Night Blossom’이 12일까지 서울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02-2287-3500.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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