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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마녀사냥’하기 좋은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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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인류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역사로 기억되는 일 중 하나가 ‘마녀사냥’이다. 14세기 후반부터 계몽주의가 만개했던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마녀 혹은 마법사로 찍히면 ‘처형’ 외에는 다른 처벌이 없었던 이 참혹한 혐의로 죽임을 당한 이는 최대 50만 명에 이른단다.

 각종 연구와 문학작품에 나타나듯 이들은 큰 죄가 없었다. 빅토르 위고 소설 『노트르담 꼽추』의 에스메랄다처럼 유력인사의 정욕과 질투를 자극하는 매력이 마녀의 징표처럼 몰려 처형된 경우도 많았다.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도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다. 권력자들이 미운털 박힌 인물을 마녀로 몰아 자기 손에는 피 묻히지 않고 군중의 분노의 힘으로 제거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마녀사냥을 활용했다는 설은 유력하다.

 한데 마녀사냥은 그 시대 유럽의 박제된 역사로만 치부되진 않는다. ‘인터넷 마녀사냥’은 이 시대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문화비평가 이택광은 “공동체 안전을 유지한다는 미명 아래 마녀사냥은 오늘날에도 지속된다. 배제를 위한 논리가 마녀 프레임의 핵심”이라고 했다.(『마녀 프레임』, 자음과 모음)

 이 대목에서 마녀사냥에 동참한 군중이 궁금하다. 마녀사냥은 마녀에게 분노하는 군중의 ‘광기’가 필수 요소였다. 군중은 마녀를 잘 알지 못하고, 누군가로부터 던져진 ‘혐의’에 분노해 ‘마녀에게 죽음을…’을 외친다. 선동당한 분노로 무고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죽이는 공범이 되는 것이다. 주인의 사냥감인 토끼를 마치 자신의 원수인 양 쫓아 끝내 목을 물어 죽이는 사냥개처럼 말이다.

 ‘마녀사냥’에 대한 상념이 이렇게 장황해진 건 ‘민주사회에서 유권자로 사는 법’에 대해 생각하면서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를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해 주셔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대목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통령의 문맥을 보면 그의 배신은 국민에 대한 배신보다는 ‘내 덕분에 당선된 인물이 나를 배신했다’는 뉘앙스가 더 강했다.

 유권자가 대통령을 뽑았을 때는 ‘대통령의 정책’을 원했기 때문이고, 이에 정치권은 대통령의 정책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우리가 원하는 정치다. 발목 잡는 정치권은 문제다. 한데 유권자들은 대통령에게 그런 정치권을 설득하고 난국을 돌파하는 능력까지 기대한다. 유권자들은 대통령을 뽑아 나랏일을 맡기고, 5년간 조용히 생업에 종사하고 싶다. 한데 대통령이 말 안 듣는 정치인을 심판해 달란다.

 이 한 말씀에 집권여당 최고위원들부터 동조해 지목된 원내대표에게 ‘닥치고 퇴진’을 외친다.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불길하고도 기막힌 장면인데, 돌이켜 보면 이 모두 유권자들의 원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우리 정치는 마녀 프레임을 구성하는 ‘배제의 논리’로 일관했다. 정치인들은 우리 사회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제시하며 표를 구하지 않았다. 야당 지도자는 어제도 오늘도 ‘심판론’만 들먹이고, 선거에선 상대방 흠집내기로 정치권은 굴러왔다. 유권자들은 정치가 마녀사냥의 선동처럼 굴러가도 심판하지 않았고, 때론 부화뇌동(附和雷同)했고, 때론 무시했고, 때론 외연을 확장한 인터넷 마녀사냥에 편승했다. 우린 과연 민주주의 주인으로 제 역할을 해온 걸까.

 다시 선동당한 군중을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분노가 ‘정의실현’의 길이라고 믿었을 거다. 잔 다르크를 비난한 군중도, 예수를 못 박으라고 외친 유대인들도, 히틀러의 선동에 광분했던 나치스도 말이다. 한데 우린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런 선동과 감성적 분노는 정의를 역행하며, 이성적 판단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의는 실현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권력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녀사냥을 권한다. 이젠 유권자들이 정신차려야 할 때다. 우리가 집단이성을 살리지 못한다면 공허한 분노로 주인을 대신해 살생을 맡는 사냥견 처지로 전락하는 ‘위험한 시절’을 계속 살게 될 거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