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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의 시단을 돌아보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7인 신작시집『마침내 시인이여』의 출간과 함께 열린 84년의 우리시단은 이 합동시집이 출판가의 거의 유례 없는 베스트셀러로 떠오른데서 상징적으로 표현되듯이 근자 수삼년간 지속되어온 시의 열기가 그 절정에 달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현상적인 사실에 의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사실은 시의 발표매체가 양적·지적으로 확장되고 다양화되었다는 점이다. 월간지·계간지 같은 기존의 매체들 이외에 「시인」「현대시」「언어의 세계」 「민중시」 같은 시 전문 무크가 새로 창간되거나 2집 또는 3집을 내놓았으며 「삶의 문학」「시와 경제」「오월시」「분단시대」등 동인지들이 의욕적인 편집을 해내고 있다. 최근 실천문학편집위원회의 책임으로 신인들의 작품만을 따로 묶어 발행한 시화집『시여 무기여』는 또 다른 시도로서 주목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고은, 신경림, 조태일을 비롯한 중견과 신진시인들이 모두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있고 아울러 앞서 말한 각종 매체들을 통해 많은 신인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결부된 현상으로서 시집 출판의 계속된 활기를 지적 할 수 있겠는데 창작과 비평사·문학과 지성사·민음사·청사·풀빛·실천문학사·문학세계사등 여러 출판사에서 각각 서너권 이상의 시집들을 기획 출판하였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외면적 사실보다 더 중요시되어야 할 것은 우리시의 구조적 변화라고나 할만한 새로운 양상의 전개다. 앞서 지적한 발표매체의 확장과 다양화는 그 자체가 이미 기성제도로서의 문단체제의 분해를 겨냥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기존의 시 개념과 시인 개념을 무너뜨리는데 까지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내적 변화의 문단적 반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변화의 객관적 조건은 어디에서 주어진 것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민중세력의 성장이며 그 자기인식의 발전이다. 이제 농촌과 노동현장의 육성적 생활언어는 점점 더 우리 시단을 압도해 올 것이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며 활동하는 노동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 상』으로 바쳐진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 은 1984년을 그것이 출판된 해로 우리문학사에 기록되게 할 하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서, 민중의 성장하는 힘이 장차 이시대의 사회와 문화에 가져오게 될 거대한 창조적 가능성의 일단을 웅변으로 예고하고 있다.
물론 좁은 의미의 민중적 시인과 전문적 시인들의 작업은 결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충격과 대응을 주고받는 가운데, 즉 일종의 사회교육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 부단한 자기경신을 거듭해갈 것이며 그럼으로써 양자는 더 높은 단계로 지향 통일될 것이다. 70년대로부터 이어져온 전문 시인들의 자기극복 노력은 그 자체가 바로 민중적 노력의 일환이며 시의 민중적 민족적 형식을 발견하려는 그들의 실험은 그런 의미에서 마땅히 중시되어야 한다.
올해의 경우 고은의 전원시편, 이동순의 농패 노래, 김정환의 『황색예수전』, 박용수의 『바람소리』 같은 장시 내지 연작시들, 신경림의 『열린굿 노래』 와 하종오의 굿시들이 하고 있는 민요와 무가형식의 현대적 수용등의 작업은 김규동 문익환 이성부 조태일 양성우 임정남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명수 정호승등의 정통적 형식에 의한 꾸준한 모색과 더불어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명에서 금년 문단의 가장 대담하고 야심적인 시도는 김지하의 『대설 남』일 것이다.
지금 한창 진행중인 엄청난 규모의 이 작업이 우리 시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열어 보일것인지, 그리고 그럴 경우 그것이 가지는 세계관적· 미학적 의의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좀더 여유 있게 검토하는 것이 도리이겠지만 어쨌든 이제 우리시는 문학사상 가장 중요한 고비에 접어들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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