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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세대, 가족 부양 자신 없어 반쪽 결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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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직장인 K씨(34·여)는 남편과 동갑내기 캠퍼스 커플로 10년 넘게 사귀다 2013년 말 결혼했다. 남편은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바쁘다”는 이유로 혼인신고를 미뤘다. 5개월 후 김씨는 혼인신고서에 남편 도장을 찍어 혼자 구청에 신고했다. 그러자 남편은 화를 내며 집을 나갔고, 얼마 후 혼인무효 소송을 냈다. “오랜 연애로 의무감 때문에 결혼했지만 공식적인 증명까지 남길 만큼 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본지가 2010년부터 5년간 전국 법원의 사실혼 부당파기 소송 판결 141건을 분석한 결과 전체 사건의 40.4%가 결혼한 지 1년 이내에 헤어진 ‘신혼 커플’이었다. 사실혼의 평균 지속 기간은 5.29년으로 법률혼(14.3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결혼식을 올린 뒤 상당 기간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반혼(半婚)’ 커플이 느는 이유는 뭘까.

 사실혼 부당파기 소송 판결을 분석한 결과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이유로 ‘신뢰 부족’을 든 경우가 46.1%로 가장 많았다. 본지가 결혼전문업체 듀오와 함께 실시한 미혼 남녀 865명 설문조사에서 혼인신고를 미루겠다는 302명 중 155명(51.3%)이 ‘상대에게 확신이 없어서’라고 밝힌 것과 비슷한 비율이다. 임채웅(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서로를 충분히 알지 못하거나 결혼 전 갈등 요인을 해결하지 않은 채 결혼식을 올린 부부는 이혼으로 인한 낙인효과가 두려워 법률혼(혼인신고)을 미루게 된다”고 설명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반쪽 결혼이 느는 건 정규직 취업이 어려운 청년 커플들이 경제적 부양 등 혼인을 유지할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라며 “이혼 자체에 대한 두려움으로 혼인신고를 않는 커플도 많다”고 분석했다.

 사실혼 부당파기 소송을 벌인 커플 중에는 결혼 후 ‘아내의 남자’ ‘남편의 여자’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해 파경에 이른 경우도 여럿 있었다. 지난해 6월 결혼한 H씨(31)는 두 달 만에 아내(29)에게 연하의 남자친구(27)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내는 H씨에게 오히려 “남친 없이 우리 결혼은 유지될 수 없다”며 결별을 통보했다. H씨는 소송 끝에 아내와 내연 남성에게서 각각 2500만, 700만원을 위자료로 받았다.

 재산이 많은 부모가 자녀를 결혼시킬 때 손자 출산 때까지 혼인신고를 적극적으로 막는 사례도 있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아들을 결혼시킬 때 이혼 시 며느리에게 돌아갈 재산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족관계등록부에 혼인이나 이혼의 흔적은 남지 않지만 결별의 대가는 치러야 한다. 결혼식 후 며칠 살지 않고 헤어졌다고 해도 사실혼이 인정될 수 있다. 이 경우 혼인 파탄에 책임 있는 쪽이 정신적 피해 등에 대한 위자료를 부담해야 한다. 사실혼 커플들이 부당파기 소송을 내는 이유도 위자료와 재산 분할을 받기 위한 것이다.

 법원은 141건의 소송 중 121건에 대해 사실혼을 인정했다. ▶일정 기간 동거했고 ▶혼인 사실을 공개했으며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이 사실혼을 인정한 주된 근거였다. 이중 120쌍(99.2%)이 한 달 미만을 포함해 짧게라도 동거 생활을 했고, 115쌍(95.1%)은 주변에 결혼 사실을 알렸다. 72쌍(59.5%)은 실제 결혼식을 올렸다.

 다만 성관계 여부는 결정적 요소가 아니었다. 김모(36·여)씨가 2013년에 낸 사실혼 부당파기 소송에서 법원은 “성관계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결혼식을 올리고 동거했다”며 사실혼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장진영 서울가정법원 공보관은 “사실혼 인정 여부에서 동거와 결혼식 등은 실제 결혼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잣대”라고 설명했다.

 법원은 사실혼 파기 소송 중 51%(72건)에 대해 책임 있는 배우자가 상대방에게 평균 2695만원의 위자료를 주라고 판결했다. 이중 남성 배우자가 잘못한 경우가 87.5%(63건)를 차지했다. 혼수 등 결혼 비용의 경우 손해배상을 청구해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혼도 혼인이 성립된 이상 사기결혼과 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결혼 유지를 위해 지출한 비용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게 판례이기 때문이다.

 소송 분석 결과 남성은 주거비를 제외하고 평균 결혼 비용으로 5541만여원을, 여성은 5432만여원을 지출했다. 남녀를 합쳐 평균 1억원이 넘는 돈을 결혼에 썼지만 반쪽 혼인에 그친 채 헤어진 것이다. 가정법원 판사 출신인 이현곤(법무법인 지우) 변호사는 “사실혼은 법률혼에 비해 가족의 결합력과 안정성이 크게 떨어진다”며 “출산율 저하 등의 사회적 문제도 크다”고 말했다.

박민제·이유정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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