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183)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16)-부함 문화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육당이 서재로 돌아가 처음 완성한 것이 『부함문화론』 이었다. 이 논문은 「조선을 통하여 본 동방문화의 연원과 단군을 계기로한 인류문화의 일부면」이란 부제가 붙어 있었는데 이 논문은 육당 자신이 자기의 대표적 저작이라고 자부할이 만큼 심혈을 기울인 대작이었다. 1925년에 완성하여 1928년 일본말로 발행되는 총서 『조선급 조선민족』에 일본문으로 번역 게재되었다.
이 『부함문화론』에 이어 1926년에는 『단군론』을 발간하였고, 또 『아시조선』도 발간하였다. 이 두 책이 다 단군과 우리 상고사를 연구한 것이었고 국토예찬의 기행문으로 『심춘순례』도 이무렵에 발간되었다. 이어서 시조집으로 『백팔번뇌』를 발간하였는데, 이 시조집에는 벽초·춘원·위당 정인보·석전 박한영등 대가들의 발문이 붙어 있었다.
이렇게 1926년에 『단군론』 『아시조선』 『심춘순례』 『백팔번뇌』 등 네권의 책을 출판하였고, 다시 조선교육회 주최의 백두산탐사단에 참가하여 『백두산근참기』를 동아일보에 연재한 뒤 1927년에 이를 단행본으로 발간하였다. 이듬해 1928년에는『금강예찬』을 발간하여 백두산기행과 함께 국토예찬의 쌍벽을 이루게 하였다.
이동안 육당은 주로 계명구락부에 출입하고 있었다. 그는 1924년 가을 시대일보를 그만두고 1925년 봄부터 동아일보 객원으로 들어갔다가 얼마안가서 그 자리를 위당 정인보에게 넘겨주었다. 이즈음 한글학자 박승빈이 인사동에 계명구락부라는 사회유지들의 사교클럽을 만들어 『계명』이라는 학술잡지를 발간하고, 동시에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고 있었다.
이 『조선어사전』은 육당이 광문회에서 시작하였다가 중단했던 것을 계명구락부에서 가져다 계속하여 진행시키고 있었으므로 육당도 자연히 이 구락부에 출입하게 되었고 계명구락부에서 발행하는 잡지 『계명』에다 『삼국견사해제』 같은 값진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8년10월 돌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회 위원으로 들어감에 따라 식자간에 큰 물의를 일으켰고 이로써 육당의 광영있는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1938년에는 만주국 신경에 가서 만몽일보사 고문이 되었고 이어서 1939년에는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1941년12월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는데 그 이듬해 병을 얻어 건국대학 교수를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1944년에는 우이동으로 집을 옮기고 여기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육당은 우이동 소원에 칩거하면서 저술에 종사하던중 1949년2월 반민족행위자 처단법에 걸려 춘원 이광수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입감되었다가 한달뒤 보석되었다.
6·25사변때에는 가족들에게 불행한 일이 있었고, 우이동에 있는 서고가 전소되어 l7만권의 장서가 불타 없어져 버렸다.
1955년 4월 육군대학에서 국사강의를 마치고 귀가하여 뇌일혈로 쓰러졌는데 3년동안 요양하다가 1957년 10월 묘동자택에서 별세하였다. 68세였다.
여기서 한가지 부기할 것은 필자가 1965년 신구문화사에서 간행하는 『한국의 인간상』 제66권 근대선각자편에 최남선의 약부를 기술하였는데, 편집위원도 모르게 실무자 몇사람이 필자의 원고를 자의로 고쳐 금전수수에 대한 터무니없는 낭설을 삽입 발간하였다. 출판사의 사과로 재판부터는 이 구절을 정정하였지만 초판의 독자들은 지금도 이 사실을 오해하고 있을는지 모르므로 여기서 한마디 말하여 두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