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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크스에 빠진 박근혜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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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에이단 포스터-카터
영국 리즈대 명예 선임연구원

내가 어렸을 때 영국 총리였던 해럴드 맥밀런(1957~63년 재임)은 “무엇이 제일 두려운가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느린 말투로 이렇게 대답했다. “아가야, 사건이지. 일이 터지는 거지.”

 사실 그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지어낸 말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즐겨 인용되는 경구로 살아남았다. 중대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 있어서나 인생에 있어서나 우리는 계획을 세우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지도자들이나 보통 사람들이나 허를 찔리는 일이 되풀이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벌어져 우리는 휘청거리고 주저앉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좋은 예다. 그는 두 번째 불운을 맞고 있다. 지난해 그가 대대적인 개혁의 시동을 걸 때 세월호가 침몰했다. 그의 정책 패키지는 잊혀졌고 세월호의 비극이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분야를 짓눌렀다. 한국은 세월호 그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2014년이 지나갔다.

 한국이 새로이 전진을 모색하는 해, 박근혜 정부의 성패를 좌우하는 해인 2015년이 밝았다. 내년 4월까지는 선거가 없기에 2015년은 박 대통령이 업적을 남길 마지막 기회의 해이기도 했다.

 그런데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 들이닥쳤다. 지금 한국 상황을 예상한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었으리라. 현재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과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학자 윌리엄 토머스(1863~1947)가 1928년에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 사실이라고 정의하면, 상황의 결과 또한 사실이 된다.”

 메르스 위기는 으스스할 정도로 세월호의 반복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어떤 징크스에 빠졌다고 느낄지 모른다. 상당히 다른 두 사건이지만 공통점은 당국의 ‘과소대응(過小對應)’이 일부 시민들의 ‘과잉반응(過剩反應)’을 유발했다는 점이다.

 경제 행위만 봐도 그렇다. 지난해에는 슬픔이, 이번에는 공포가 사람들로 하여금 밖으로 나가 소비하는 게 아니라 집에 남아 있게 만들었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해수욕장이 적막하다. 지난해에 이어 식당·가게·극장·백화점 할 것 없이 큰 타격을 입고 있다.

 당국이 행동에 나섰다. 최경환 총리대행은 메르스 피해에 4000억원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평소처럼 일상생활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예컨대 예전처럼 주말 여행을 다녀오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길거리나 해변, 극장이나 학교에서 메르스에 감염된 사람은 없다. 공공장소는 아직 안전하다.

 결혼식 하객들이 모두 마스크를 쓴 기념사진이 바이러스처럼 전 세계로 전파됐다. 재미 삼아 찍은 사진이라는 사실은 뒤늦게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한국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한국인들은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슬픈 일이다. 레저 산업이 입고 있는 피해는 심각하다. 한국인들은 판단력도 있고 용기도 있는 사람들이다. 공포심을 이겨내고 최 총리대행의 호소에 부응할 때다. 달리 표현한다면 훌륭한 케인스주의자(Keynesian)로서 행동할 때다. 밖으로 나가 지출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애국심이 요구하는 의무다.

 정치도 영향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방미를 연기했다. 올바른 결정이었을까. 많은 사람이 세월호에 대한 박 대통령의 대응을 비판했다. 박 대통령이 워싱턴으로 떠났다면 역시 맹비난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건 안 가건 공격받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세월호와 마찬가지로 메르스는 공공 안전을 위한 교훈을 미래에 남길 것이다. 이미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한 기관들이 투명성 제고와 관행의 변화 등 몇 가지 교훈을 파악해 냈다.

 세월호는 ‘올 것이 온 것’이었다. 여러 건의 규제 실패가 낳은 인재(人災)였다. 메르스도 인재일까. 그렇게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메르스는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영국을 포함해 다른 나라들이 한국보다 반드시 더 잘 대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메르스는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세월호의 경우 정부의 책임을 묻겠다는 야당의 집요한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박 대통령이 수세로 몰렸지만 새누리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원인은 부분적으로 야당이 심각한 내분에 빠졌기 때문이다. 나는 메르스를 두고도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박 대통령의 곤경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메르스를 예측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박 대통령에게 설상가상의 위기다. 메르스를 신속하게 이겨내더라도 2015년은 거의 반이 지나갔다. 박 대통령의 임기가 반이 지난 것처럼 말이다. 그의 개혁이 탄력을 상실했다는 게 진짜 문제다. 2014년 박 대통령은 경제에 집중하려고 했으나 기회가 그를 피해 갔다. 그리고 지금 2015년도 같은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맥밀런 전 총리가 두려워했던 ‘그놈의 사건’ 때문이다.

에이단 포스터-카터 영국 리즈대 명예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