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177)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10)-「청년학우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잠시 뒤로 돌아가 청년학우회와 최남선과의 관계를 이야기해야 하겠다.
도산 안창호는 1878년 강서에서 출생하였는데 두뇌가 명석하고 특히 웅변으로 유명하였다. 22세때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8년후인 30세때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1907년이었다.
그는 즉시 신민회의 조직에 착수하였는데, 신민회의 목적은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위한 비밀결사였다. 각도에 한사람씩 책임자가 있고, 그일에 군책임자가 있어서 아래로는 동지를 알수 있지만 옆으로는 알수 없게 되었었다. 동지를 구하는데 두가지기본조건이 있었는데, 첫째는 믿을만한 사람이고, 둘째는 각도에서 대표적 인물을 고르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방색이라는 악습을 없애기 위한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모인 동지가 이동영·이회영·전덕기·이동휘·최광옥·이승훈·안태국·김동원·김구·이갑·유동설·양기탁등이었다. 그리고 신민회는 비밀결사이지만 사업은 공개적이었는데, 그 사업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평양의 대성학교와 평양·경성·대구의 태극서점이었다.
대성학교는 각도에 세울 작정이었는데 평양의 대성학교가 가장 모범적이었고 안창호가 교장이 되었었다.
안창호는 이와 동시에 평양마산동에 도자기회사를 만들어 물건 만들기를 시작하였다. 도산은 한국의 경제파탄을 막을길은 오직 자작자급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고, 공업을 한국의 생명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마산동의 도자기회사를 성공적으로 발전시켜 전국에 산업운동을 일으키는 본보기로 삼으려 하였다.
그것 다음에 계획한 것이 청년학우회 운동이었다. 이 청년학우회는 도산이 신민회나 대성학교 이상으로 심혈을 경주한 사업이었다. 구습에 물들지 않은 큰뜻과 정열을 가진 청년학도들을 단결시켜 일대 수양운동· 일대민족향상운동을 일으키려고 조직한 것이 청년학우회였다. 이것이 합방 전년인 1909년의 일이었다.
청년학우회는 무실·역행·충의·용감을 4대정신으로 삼아 인격을 수양하고, 한가지 이상의 전문학술이나 기예를 학습하고, 평생에 덕·체·지의 삼육에 힘씀으로써 건전한 인격자가 되기를 기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운동을 일으킨 중심인물은 도산을 비롯하여 윤치호·이상재·양기탁등이었는데, 도산은 이 속에 20년이나 젊은 최남선을 설립위원으로 위촉하였다. 최남선은 당시 신학문을 배운 유일한 신진기예의 청년학도였기 때문에 이 운동에 가담시켜 이 운동의 이론적방면을 담당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렇게해서 최남선은 청년학우회의 취지·강령을 만들고 회가를 만들었다. 청년학우회는서울과 평양을 비롯하여 전국 주요도시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안창호는 청중에게 특별히 최남선을 소개하고 강연을 시켰으므로 최남선의 이름이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이 운동은 경향 각지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강연이 있을 때마다 수천명의 청중이 모였고 강연이 끝난 뒤 연사와 좌담회를 열어 민중들과 접촉하였으므로 민중의 절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평양 대성학교에서 열렸을 때에는 평양시내가 총출동하다시피 많은 청중이 모였고 최남선이 지은 청년학우회 노래가 방방곡곡에 퍼졌다고 한다.
이렇게 2년동안 전국을 순회하여 민중의 계몽에 힘썼고 최남선은 도산과 더욱 정분이 두터워져 그의 신임을 받았다.
l910년 춘원이 동경에서 정주로 돌아가는 길에 서울에 들러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