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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굿바이, 종이통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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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직장인 윤진하(28)씨는 종이통장을 손에 쥐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계좌 잔액을 확인하거나 이체를 할 때 모바일 뱅킹을 주로 이용한다. 금융상품에 새로 가입할 때도 온라인을 통한다. 스마트폰 전용 통장도 최근 만들었다. 윤씨는 “항상 스마트폰을 갖고 다니기 때문에 인터넷 뱅킹보다 스마트폰 뱅킹이 이용하기 쉽다는 생각 때문”이라며 “요즘처럼 금리가 낮을 땐 일반 입출금 상품보다 0.2%포인트라도 우대 금리를 챙겨주는 모바일 전용 상품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정애(45)씨는 얼마 전 펀드를 가입하려 은행을 찾았다. “온라인 전용으로 펀드를 개설하면 같은 상품이라도 1%인 선취판매수수료를 절반인 0.5%만 내면 된다”는 지점 직원의 설명을 듣고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이씨는 인터넷 뱅킹을 통해 온라인 전용 펀드에 가입했고 종이통장 없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펀드 수익률을 확인하고 있다. 그는 “전세자금 같은 목돈을 대출 받을 때가 아니면 인터넷 뱅킹이나 모바일 뱅킹을 이용하는 게 훨씬 편리하다”고 했다.

 가로 14㎝, 세로 8.7㎝ 크기에 20쪽 종이가 빼곡히 차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찍혀있는 숫자가 커지면 뿌듯함도 함께 부푼다. 종이통장의 추억이다. ‘통장을 몇 개 가지고 있느냐’가 알뜰함과 부의 척도였다. 그런 종이통장이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14일 우리은행이 집계한 수치를 보면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영업점에서 출고된 종이통장(저축성 예금 기준) 개수는 한 달 평균 12만6900개였다. 2013년 22만8480개, 지난해 13만5440개로 월평균 발급 건수는 해마다 줄고 있다. 2년 만에 발급량이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지점에서 나가는 종이통장 수가 줄자 은행에선 종이통장 주문량을 줄이고 있다. KB국민은행은 2010년만 해도 수시입출금, 예·적금, 펀드 등 용도로 2530만 개에 달하는 종이통장을 납품 받았다. 2012년 1158만 개로 줄였고 지난해 809만9200개에 그쳤다. 불과 4년 새 3분의 1로 감소했다. NH농협은행도 마찬가지다. 2013년 872만 개, 지난해 822만 개로 종이통장 발급량을 점차 줄여나가고 있다.

 변양규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점차 금융 플랫폼이 인터넷과 모바일로 연결되면서 점포 없는 은행 시대가 올 것”이라며 “적어도 10년 후엔 종이통장을 보려면 박물관을 가야할지도 모른다”고 관측했다.

 ‘종이통장의 종말’을 부추기고 있는 건 인터넷·모바일 뱅킹의 부상이다. 종이통장의 가장 큰 역할은 계좌조회와 출금·이체다. 과거 돈이 제대로 들고났는지 확인하려 통장 정리를 하는 수요가 많았다. 개인용컴퓨터(PC)와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많은 것을 바꿔놨다. 통장이나 카드를 들고 지점 창구를 방문하거나 은행 자동화기기를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

 모바일 뱅킹의 확산은 종이통장의 멸종을 앞당기고 있다. 손안에 든 스마트폰에서 은행 앱을 켜면 실시간으로 간편하게 입출금 내역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적금과 펀드 가입에서 해지까지 스마트폰 하나로 가능하다. 통장은 물론 카드조차 필요가 없다. 종이통장의 뒤를 이를 멸종 후보로 플라스틱 카드가 꼽히는 까닭이다.

 황석규 교보증권 연구원은 “요즘 종이통장은 거래 내용을 확인하는 수단 정도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발급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최근 지급 결제 시장을 보면 75%가 신용카드가 차지하고 있어 화폐의 쓰임도 줄고 있다”면서 “더욱이 요즘 신용카드에서조차 실물 없는 모바일 카드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종이통장을 만들고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도 무시 못할 이유다. 종이통장을 제조하는 데 드는 원가는 장수가 많은 수시입출금 통장의 경우 개당 140~145원, 페이지 수가 적은 예적금·펀드 용도 통장의 경우 125~130원 정도다. 고객에게 ‘무료’로 제공해야 하는 종이통장을 은행으로서도 굳이 권장할 이유가 없다. 다만 고령층 등 기존 실물통장을 선호하는 계층이 아직 있기 때문에 은행마다 올해 700만~800만 장 안팎의 종이통장을 납품 받은 상태다. 그마저도 해가 지날수록 점점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 연구에 따르면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한 모바일 뱅킹 이용자 가운데 50대 이상 연령의 비중은 2013년 말 13.5%에서 지난해 말 16.3%로 상승했다. 간편함과 낮은 수수료를 무기로 내세운 모바일 뱅킹에 중·장년층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앞으론 인터넷 전문은행의 등장과 비대면(은행 직원과 얼굴을 맞댈 필요없는) 금융거래 확산으로 종이통장은 물론 종이서류 없는 은행시대도 현실로 다가올 전망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18일 은행 계좌를 열 때 온라인으로 실명을 확인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고치기로 결정했다. 은행 직원과 직접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새로 계좌를 열 수 있게 했다. 금융실명제법의 근간인 ‘대면 확인’의 원칙을 22년 만에 손질한다. 인터넷 전문은행, 모바일 뱅킹 등 핀테크(FinTech·금융+정보기술)를 키우는데 장애물로 작용할 요소를 일찌감치 없애려는 목적에서다.

 서병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보기술(IT)이 발전하면서 금융환경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최초의 모바일 다이렉트 은행인 ‘무브앤뱅크(MOVENBANK)’ 설립자인 브렛 킹이 저서 『뱅크 3.0』에서 밝힌 시대가 빠르게 현실화 하고 있다”며 “현금과 통장, 카드, 수표 중심이던 ‘돈’이 인터넷과 스마트폰 기술 혁신으로 인터넷 전문은행, 모바일 카드 등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현숙·염지현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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