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의 지자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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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갖가지 정치적 이유로 중단되었던 지방자치제가 87년 상반기부터 실시되게 된것은 여러 측면에서 뜻깊은 일이다.
이로써 공전국회가 정상화의 실마리를 찾은 것도 그렇지만 민주주의가 토착화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조건이 이룩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번 타결을 환영해마지 않는다.
지자제가 의회제도와 함께 민주주의의 양대 근간임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지방자치를 그렇게도 기피했던 유신헌법이 부칙에서 실시시기를 통일 이후로 미루면서도 본문은 지방자치를 규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동안 실시를 미루면서 제시된 이유가 전혀 얼토당토않은 것은 아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일찌기 봉건영주제가 발달해서 민주화과정에 지방자치가 포함되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이른바 「번」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제도는 서구식 지방자치제를 받아들이는데 윤활유 구실을 한 셈이 된다.
거기에 비해 우리나라는 통치기구가 중앙집권적으로 되어있어 지방민이 스스로의 문제를 자치적으로 처리·해결할 훈련을 쌓지 못했다. 그런 여건에서 50년대에 이미 읍·면 단위까지 불쑥 지방의회를 구성했으니 그 부작용이 엄청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도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났고 그동안 우리의 살림규모는 물론 사회상도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게 달라졌다.
재정 자립도만 해도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가 자치제를 실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것은 벌써 오래 전이다.
전면실시는 몰라도 몇몇 대도시에서 제도실시를 더 이상 미룰 이유나 명분은 찾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서울특별시의 경우 예산은 2조원이 넘는다. 정부총예산의 6분의1 규모에 이른다.
이런 방대한 예산이 담당관들 몇 명에 의해 짜여지고 총리실의 심의를 거쳐 집행된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무리 관료들이 유능하다해도 행정적인 독단이 부를 낭비는 불가피한 일이 된다.
물론 시의회가 구성되면 시의 업무수행에 차질이 생기고 더러 잡음이나 부작용도 생길 수 있다. 비용 또한 적잖이 들것으로 예상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의적인 정책운용에서 오는 낭비에 비하면 이를 견제하기 위해 드는 비용은 많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마디로 지자제라지만 그 내용은 방법에 따라 다양해진다. 87년부터 실시한다는 우리의 지자제는 특별시·직할시 및 도의 의회구성에 그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장·지사를 비롯한 자치단체의장을 직선으로 하는데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지방자치의 전통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시·도 의회 구성부터 하고 단계적으로 하위 행정단위까지 실시한다는 것은 일단 불가피한 것 같다. 그런 판단은 전면실시가 부를 정치적인 충격과 부작용을 덜자는 뜻에서이지 궁극적으로 읍·면 단위까지의 자치제실시가 바라직함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국민 모두가 피땀을 쏟아야한다는 같은 이치로 자치능력을 키우는 일은 기본적으로 시민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인식을 가다듬어야 할 때다. 시민의 「의식 자립도」는 행정의 능률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자제를 둘러싼 여야의 지루한 줄다리기는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당이 당리당약을 초월할 수는 없겠지만 거기에만 너무 집착하지 말고 지자제의 실시를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한 귀중한 계기로 삼아주길 당부해 마지 않는다.
자치제가 민주정치의 훈련장이라는 점에서 이제부터 우리가 보시하려는 지자제는 우리의 실정에 맞는 것이어야겠지만 무엇보다 민주주의원칙에 충실한 제도로 가꾸고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나무만 보는게 아니라 숲도 볼 수 있는 개발과 발전을 촉진하고 지원하는 지방의회의 출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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