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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병기 칼럼] 대통령의 위기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31호 30면

“여기 계시다가 건강하게 다시 나간다는 것은 다른 환자분들도 우리가 정성을 다하면 된다는 얘기죠?” (5일 국립중앙의료원 방문 때 의료진에게)→“다른 환자들 역시 우리가 뜻을 모아 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 한다면 감염과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전국을 강타하던 지난 5일 인터넷에 ‘박근혜 번역기’가 등장해 화제가 됐다. 이날 페이스북에 선보인 ‘박근혜 번역기’는 박 대통령의 대선 로고인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를 패러디한 ‘내 말을 알아 듣는 나라’라는 문패와 함께 박 대통령 특유의 화법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해준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달려 있다.

의미가 모호한 대통령의 화법이나 문법에 맞지 않는 말 실수를 신랄하게 풍자하면서 개설 1주일 만에 2만 8000여명이 ‘좋아요’를 누를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속마음 번역 기능’과 ‘유체이탈 화법 번역 기능’을 담은 2.0 버전으로 업데이트까지 했다 하니 이제 대통령의 말도 맘놓고 웃음의 소재로 삼는 표현의 자유를 확실하게 누리는 세상이 된 듯하다.

‘박근혜 번역기’의 등장은 현 정부의 소통 부족과 이에 대한 민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메르스 발병 이후 박 대통령의 초기 대처를 지켜보면서 사회 현실에 대한 문제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1년 전 ‘세월호 7시간’ 논란의 판박이처럼 위기의 초동 관리 실패를 또다시 드러냈다는 비판이다.

메르스 발생 상황과 대통령의 동선을 다시 한번 복기해보자.

(메르스의 확산) 5월 20일 메르스 첫 확진 환자 발생→6월 1일 첫 사망자 발생→2일 3차 감염 첫 확인→3일 확진 환자 30명 돌파→5일 확진 환자 40명 돌파, 사망자 4명→10일 확진 환자 100명 돌파, 사망자 9명

(박 대통령) 1일 국회법 개정안 반대 입장 발표→2일 전남 창조경제센터 출범식 참석→3일 충남 국방과학연구소 종합시험장 미사일 발사 참관→3일 오후 메르스 대응 민관합동 긴급 점검회의 주재→5일 국립중앙의료원 방문→10일 미국 방문 연기 발표

박 대통령이 진두 지휘에 나선 것은 첫 환자가 발생한 지 14일 만인 지난 3일. 그러고도 이틀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일선 의료 현장을 방문했다. 메르스 확산 과정과 비교해보면 뭔가 한 박자씩 늦는 듯한 행보다. 에볼라 대응 때 오바마 대통령이 완치 간호사와 포옹하는 것과 같은 인상적인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공식 회의에서도 발생 환자 수를 틀리게 말하는 바람에 스타일을 구기며 청와대의 허술한 정보 관리 수준만 드러냈다. 현실과 엇박자를 빚는 이런 모습이 오죽했으면 박 대통령의 말과 행동에 번역기가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나왔을까. 대통령의 언행은 정부의 무능한 대응을 공격하는 소재로 거침없이 희화화되고 있다.

미국의 커뮤니케이션학자 에버렛 로저스는 『개혁의 확산(Diffusion of Innovations)』에서 혁신이 퍼지게 하려면 남들보다 혁신을 빨리 받아들이는 얼리 어댑터(early adopter)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혁신자 혼자가 아니라 얼리 어댑터들이 문제 해결에 앞장 서야 대다수가 뒤따라 가거나 뒤늦게 쫓아온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내부엔 문제 해결의 ‘얼리 어댑터’들이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위기 국면에서조차 현장 인식의 감이 떨어지는 것은 대통령 주변에 위기를 위기라 부르지 못한 채 눈치만 보는 ‘팔로어’들만 득실대기 때문은 아닐까. 박 대통령은 더 늦기 전에 사회 문제의 인지와 위기 관리의 감지망을 새롭게 손질해야 한다. 낙타고기를 멀리 하라는 방역당국의 엉뚱한 지침과 같이 현실에 맞지 않는 탁상공론은 과감히 버리고 민심 소통의 감도를 복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박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에 국가 개혁의 ‘수퍼 전파자’가 되는 첫 걸음이다.

홍병기 정치 에디터 klaat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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