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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지젤은 잊으세요 뼈대만 남기고 싹 바꿨습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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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호 08면

늘 의문이었다. 사랑에 배신당했다고 왜 죽나? 죽은 것도 억울한데 왜 귀신이 돼서까지 기를 쓰고 배신남을 구해주나? 약혼자를 두고 양다리를 걸치는 남잔 또 뭔가? 남자에게 복수하겠다는 처녀귀신 윌리들은 왜 천사처럼 온화한가? 고전발레 ‘지젤’을 보면서 품었던 의문과 불만이 새로운 ‘지젤’에서는 대부분 해소될 전망이다.

‘한국적 지젤’ 안무가 그램 머피와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

31년간 시드니 댄스컴퍼니 예술감독을 지낸 호주의 대표적 안무가이자 ‘최고의 발레 스토리텔러’ 그램 머피가 유니버설발레단과 손잡고 재창작한 ‘그램 머피의 지젤’(13~1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이다. 현역 시절 동양인 최초로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에 초청돼 일곱 차례 커튼콜을 받으며 국내외적으로 ‘가장 지젤다운 지젤’로 불렸던 문훈숙 단장이 앞장서서 지젤 재해석을 시도한 셈이라 더욱 흥미롭다. 170여 년간 원형에 가깝게 유지되다가 21세기 버전으로 다시 태어난 지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램 머피와 문훈숙 단장을 개막 전 함께 만났다.

“로맨틱 지젤은 잊어주세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에 필적하는 모던 지젤입니다.”(문)

“어느 시대나 장소에 묶어놓고 싶지 않았어요. 동화 속 인물들에게 실제 감정을 불어넣고 싶었죠.”(머피)

4일 오전 유니버설발레단 스태프들은 세팅 작업으로 분주했다. 지난 밤을 꼬박 새워 조명과 장치를 테스트했다는 그램 머피는 ‘호주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대가답게 피곤한 기색없이 여유로웠다. 새벽에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문훈숙 단장도 기대에 부푼 얼굴이었다. ‘지젤’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이지만 촬영을 할 때도 무용가답게 즉석에서 포즈를 연출하는 호흡이 척척 맞았다.

이들이 선보이는 ‘지젤’은 올해 국내 발레계 최고의 기대작이다. 지금껏 외국 발레단의 작품을 열심히 복제해 온 우리 발레계가 야심차게 준비한 세계 초연작이기 때문이다. ‘심청’ ‘춘향’ ‘왕자호동’ 등 우리 고전을 소재 삼은 창작물은 더러 있었지만, 세계적인 안무가가 우리 발레단을 통해 초연작을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작 ‘지젤’은 순수한 사랑에 배신당한 슬픔과 광기의 드라마가 생사를 넘어선 숭고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낭만 발레의 정수다. 머피는 이같은 스토리의 뼈대만 남기고 싹 바꿨다. 납득불가능했던 지젤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출생의 비밀을 담은 프리퀄을 설정하고, 주변 인물들의 행동에도 설득력을 부여했다. 클래식의 틀을 넘어 네오클래식과 컨템포러리가 섞인 격정적 안무, 국악기까지 도입해 전혀 새롭게 작곡한 음악은 ‘로맨틱 지젤’에 길들여진 관객을 도발한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만큼 파격적인 작품
시작은 머피의 전작 ‘백조의 호수’(2001)였다. 다이애나 황태자비를 둘러싼 영국 왕실 스토리를 입힌 충격적 무대에 문 단장이 깊은 인상을 받은 것.

“막연히 작품을 의뢰할 생각만 품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연히 만난 호주 공무원에게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공연이 꿈’이라고 인사를 했더니 바로 머피 얘기를 하더군요. 마침 한국 정부가 테크놀로지와 문화예술의 접목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머피가 한국에서 홀로그램 발레를 만들면 좋겠다는 거에요. 홀로그램이라면 ‘지젤’이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첫 미팅에서 머피의 첫마디가 ‘코리안 지젤’이었어요. 순간 소름이 돋았죠. 홀로그램은 극장 환경 탓에 무산됐지만 차차 실현해 갈 예정입니다.”(문)

두 달 가까이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 문화를 배우고 있다는 머피도 바로 이 ‘코리안 지젤’을 강조했다. 자기 것만 주는 일방 통행이 아니라 우리 문화에 젖어들면서 안무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내 스타일로만 독재하는 게 아니라 여기서 매일 배우면서 만들고 있어요. 작곡가도 한국 음악을 모르지만 공부해서 국악기까지 녹여냈죠. 이곳에서 한국 무용수들과 함께 만들고 있기 때문에 ‘코리안 지젤’입니다.”(머피)

그는 고전을 존중하지만 새로운 역사를 만들며 전진해 나가기 위해 재해석을 한다고 했다. 장르와 관객을 함께 미래로 데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보세요. ‘로미오와 줄리엣’도 다양한 버전이 나올수록 원작의 매력이 더해지며 새로운 관객을 얻어가죠. 내 ‘백조의 호수’를 두고 자기들이 숭배해온 걸 파괴시켰다고 생각하는 평론가도 있지만, 우린 역사에 일부를 더해가는 것이지 전통을 무너뜨리려는 게 아니에요. 호주에서는 10년 넘게 내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다보니 이제 클래식처럼 여깁니다. 신기한 일이죠.”(머피)

‘백조의 호수’에 다이애나의 스토리를 입힌 것도 무용수들을 한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동화의 평면적 캐릭터가 아닌 실제 인물을 연기한다면 열정, 광기 같은 실제 감정들을 훨씬 와닿게 춤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젤에 프리퀄을 만든 것도 마찬가지에요. 옛날 지젤은 그저 동화속 이야기죠. 나의 지젤은 현실적인 인물이길 원해요. 2차원이 아닌 3차원적 인물로 만들기 위해 엄마, 아빠를 등장시켰죠. 무용수에겐 굉장한 도전이긴 해요. 그들이 실제 겪었던 감정을 통해 입체적인 인물을 만들어야 하니까요.”(머피)

고전 재창작을 많이 해온 그지만 음악을 바꾼 건 처음이다. 당초 영화 ‘마오의 라스트 댄서’의 작곡가 크리스토퍼 고든이 편곡을 시도했지만 ‘중고차를 두드려 새 차로 만드는 것만큼’ 쉽지 않았다. 문 단장도 처음엔 원치 않았다고 했다. “음악이 제일 걱정이에요. 워낙 타고난 스토리텔러라 스토리텔링이나 컨셉트는 아무 걱정 없죠. 음악의 비중이 큰데 저한테도 익숙지 않으니 뚜껑 열 때까지 모르겠어요. 관객이 판단해 주시겠죠.”(문)

머피는 “나를 먼저 음악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버전이 많은 다른 작품에 비해 ‘지젤’은 170년 동안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버전이 있기에 관객조차 음악만 들어도 동작을 연상해 버린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발레계는 스트라빈스키나 프로코피예프에게 음악을 의뢰해 발레계는 물론 음악계에도 기여해 왔죠. 문 단장이 무용수들이 고전에 완벽하다고 해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단계를 요구하듯, 장르 면에서도 마찬가지에요. 테크닉이 좋아진 무용수들이 도전할만한 작품을 만들어내야 장르 전체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머피)

강렬한 사물놀이 리듬에 맞춘 동양적 안무가 매혹적
문 단장의 걱정이 무색하게 연습실에서 엿본 결투장면과 남성군무 등은 강렬한 사물놀이 리듬에 맞춘 동양적인 안무가 퍽 매혹적이었다. “타악이 좀 많다”는 문 단장에게 머피는 “와이 낫?”이라고 반문한다.

“타악은 새로운 팔레트를 줍니다. 세상은 둥글고 모든 것이 열려있죠. 작곡가들도 서로서로 훔치면서 발전했듯, 발레도 이국적인 느낌을 환영합니다. 30년 전에 중국에서 무용수들을 가르쳤지만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게 많아요. 무도나 아크로바틱 등 모든 움직임이 흥미로웠죠. 발레의 언어는 하나지만 문화에 따라 움직임은 미묘하게 다르거든요. 다른 문화 요소가 조금씩 섞이며 화학작용이 일어나 새로운 뭔가가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머피)

그는 “해외공연에도 한국적인 맛을 가져가는 게 좋다”며 호주 발레단이 매년 자신의 ‘백조’를 공연하는 이유도 ‘호주 발레단이 ABT의 ‘백조’를 하는 것을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 단장이 머피에게 세계 초연작을 의뢰한 이유기도 하다.

“‘심청’ ‘춘향’으로 해외에 나가 ‘왜 우리를 초청했느냐’고 물으면 ‘오리지널 피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요. 나초 두아토 같은 세계적인 안무가의 작품을 들여오면서 깨달은 게 있죠. 우리 문화가 담긴 것도 필요하지만, 저명한 안무가가 오리지널 워크를 만들어주는 것이 발레단의 위상과 직결된다는 거죠. 세계 발레계 전체가 우리 공연에 관심을 갖게 되니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맥밀란, 크랑코를 요구하듯이 다른 곳에서 우리 공연권을 요구할테고, 우리 무용수들이 연출가로 초청받을 수도 있을 거에요.”(문)

머피가 만든 ‘지젤’의 또 다른 차별점은 윌리들의 공격적 안무다. 그는 ‘처녀귀신들의 춤이 왜 온화하기만 할까’ 늘 의문이었다고 했다. ‘악마도 아름다울 수 있다’며 아름다움 속에 강렬한 힘을 불어넣다보니 지젤 특유의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느낌은 기대하기 힘들다.

“너무 달콤하면 현실적이지 않죠. ‘지젤’은 발레 역사의 낭만시기에 나온 작품인데 그 시대 여성과 현대 여성은 달라요. 더 강하고 더 독립적이며 요구가 많죠.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이 무대를 보면 사랑을 느끼도록 만들었어요. 사랑은 누구나 유니버설하게 느끼는 거니까요.”(머피)

“고정관념을 갖고 보면 소화하기 힘들 거에요. 유니버설이 자랑하는 윌리들의 칼군무도 없어요. 모던한 작품에선 군무들이 거의 솔리스트 역할을 하니 군무가 있어도 컨템포러리한 형식이죠. 클래식 테크닉을 완전히 벗어난 무대라는 걸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문)

현역시절 ‘지젤의 대명사’로서 변화된 지젤에 대한 느낌을 묻자 문 단장은 독특한 관전 포인트를 제시했다. 전혀 달라진 ‘첫만남의 순간’이다.

“지젤을 춘 사람으로서 제일 중요한 모멘트가 처음 눈맞추는 순간이거든요. 음악이 끊기면서 정지된 3초 동안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인데, 음악도 움직임도 없는 가운데 엄청나게 많은 감정이 오가죠. 그 순간을 이 분은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했는데, 마주보는 게 아니라 꽃을 줍던 지젤이 알브레히트의 발부터 점점 올려다보더군요. 너무나 황홀해 보였어요. 2막에는 알브레히트가 무덤에서 나온 지젤을 발부터 보게 되거든요. 그런 컨셉트들이 정말 환상적이에요.”(문)

머피도 한국 무용수들과의 첫 작업에 무척 만족한 얼굴이었다. 문 단장이 용기를 내어 작품을 의뢰한 것처럼 무용수들에게도 용기와 도전의 여정이었을 거라며 함께 땀흘릴 수 있어서 행복했단다. “내 안무는 괴물 같거든요.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힘들고 요구가 많죠. 반복적인 게 없고 박자도 어려워 처음엔 아마 충격받았을 거에요. 특히 주역들이 잘 안되면 포기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들은 끝까지 스스로 채찍질해가며 이뤄내더군요. 8주가 지난 지금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 스텝을 만들어낸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무에요. 내 것을 선물로 주고 오너십을 잃는 거죠. 이제 한발 물러서 작품이 성장하는 것만 지켜보면 되니 난 얼마나 행운아인가요.”(머피)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유니버설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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