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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광장] 도농 복합도시의 선물 ‘로컬 푸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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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호 30면

“많이 파셨어요?”
“오늘은 비가 와서 좀 그래유!”
“비가 그친다니 많이들 오시지 않겠어요?”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유….”

요즘 세종시 신도시에서 농민 김씨를 자주 만난다. 세종시 전의면에서 평생 채소농사를 지어온 분이다. 상추나 쑥갓, 배추를 재배하는 솜씨는 달인에 가깝지만 늘 판매에 애를 먹어왔다. 세종시가 로컬 푸드(local food) 운동의 일환으로 아파트 주변과 각종 행사장에 장터를 열자 직접 기른 채소를 갖고 나오는 것이다. 늘 웃는 얼굴로 그가 내놓은 채소는 언제 봐도 싱싱하고 먹음직스럽다.

농민들의 삶이 열악하고 살림살이가 어렵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언론에 억대 농부 얘기가 나오고 특작물로 많은 돈을 벌었다는 보도가 있지만 농민들의 삶은 너나 할 것 없이 팍팍하고 힘겹다. 농가당 평균 농지가 1.5ha에 불과하고, 순수한 농업소득은 가구당 연간 1003만원으로 월평균 84만원에 그친다. 농사일이 아닌 데서 얻는 농업외소득이 아니면 생존이 불가능한 것이다.

소비자들은 소비자대로 우리 농산물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주부들은 믿고 사먹을 만한 농산물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천성이 착한 농부 김씨가 귀가 따갑도록 듣는 얘기가 “농약 안쳤나요?” “믿을 수 있어요?”라는 질문이다. 게다가 질 낮은 외국산 농산물이 식탁을 장악하게 되면서 국산이든 외국산이든 농산물 전체가 불신의 늪에 갇힌 신세가 됐다.

몬산토나 카길 등 다국적 회사가 생산한 농식품이나 2만㎞ 떨어진 칠레에서 수입한 포도, 1만㎞ 떨어진 캘리포니아에서 들여온 쌀이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라고 믿는 소비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로컬 푸드 운동은 이러한 글로벌 식품체계(global food system)에 종속되지 않고, 동네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동네에서 소비하자는 것이다. 이동 거리를 줄여 신선도를 높이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세종시가 운영하는 동네 로컬 푸드 싱싱장터가 인기를 끄는 것은 가격과 품질을 잡았기 때문이다. 생산자연합회 회원들이 직접 생산한 농산물을 당일 수확해 소비자와 생산자가 서로 만족하는 선에서 가격을 정한다. 원산지와 생산자를 표시하고 리콜제까지 도입해 신뢰감을 심어준다. 도심에 건설 중인 직매장이 완공되면 농민과 소비자의 거리도 훨씬 가까워지고 항시 질 높은 로컬 푸드를 사고 팔 수 있는 시스템도 구축된다.

세종시는 첨단 신도시와 전통적인 농촌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대표적인 도농복합도시이다. 21세기 최고 건축과 과학기술을 동원해 건설한 행정도시에 정부 부처 공무원이 이주해왔고, 다른 한편에는 벼·복숭아·배를 재배하는 농민들이 살고 있다. 도시화로 경지면적이 줄고 농업기반이 축소되면서 농촌사회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로컬 푸드는 농민들에게 반전의 무대다. 가까이 이사 온 도시민을 든든한 소비자이자 우군(友軍)으로 확보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이다. 신도시의 정부부처와 국책연구소 종사자, 또 그 가족들은 구매력도 있고 질 높은 농산물에 대한 욕구가 높다. 소비자들로서는 가까운 농촌에서 생산한 신선하고 저렴한 농산물이 여간 매력 있는 게 아니다. 세종시의 빼어난 생태와 자연환경을 결합한 농촌 체험과 관광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로컬 푸드 운동은 단순하게 동네 농산물을 매매하는 것이 아니다. 위기에 놓인 농촌과 농민을 살리고 도시민에게는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상생과 상호 이익의 자리다. 농민과 도시민이 함께 나누고 소통·공감하며 하나의 시민으로 거듭나는 융합의 공간이고 공동체 건설의 현장이다.

농업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지난 1일 한국과 중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다. 상당수 농산물이 관세 철폐·감축 대상에서 빠졌지만 머지 않아 빗장이 풀리고 농민들이 살벌한 글로벌 경쟁 시장에 내 몰릴 게 뻔하다. 천만다행으로 지난 달 29일 ‘지역농산물 이용촉진 등 농산물 직거래 활성화에 관한 법률’(일명 로컬푸드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로컬푸드가 모든 농촌 문제를 해결해줄 만능열쇠는 아니다. 그렇지만 자비와 배려는 사라진 채 승자독점 약육강식의 논리만 횡행하는 어두운 밤바다에 이만큼 든든하고 믿음직스런 나침반도 없을 것이다. 로컬 푸드가 평생 얼굴이 까만 김씨에게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



이춘희 1955년 생.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제21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도시계획 전문가로 초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과 건설교통부 차관을 역임했다. 2014년 7월 제2대 세종시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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