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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이코노미쿠스] 뚱뚱한 손님 차별하던 아베크롬비의 인과응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국 헌법의 기본 정신은 자유와 평등입니다. 특히 성별ㆍ인종ㆍ종교 등 그 어떤 이유로도 개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게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본 정신이죠.

취업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력서에 사진 붙이는 걸 당연시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진을 보면 성별이나 인종, 나이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죠. 디지털 시대 망해가는 사진관을 살린 게 우리나라에선 ‘이력서 사진’이라는 현실과는 참 거리가 머네요.

이런 마당에 2일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취업 준비생 48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력서에서 가장 없어져야 할 항목’으로 응답자의 55%가 ‘키ㆍ몸무게’를 꼽았네요. 사진도 못 붙이게 하는 미국 vs 키ㆍ몸무게까지 적어야 하는 한국. 참 대조적입니다.

평등이라는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미국의 정신이 다시 한 번 입증된 판결이 있었습니다.

히잡을 쓴다는 이유로 미국 의류회사 아베크롬비 앤 피치(이하 아베크롬비)’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무슬림 여성이 1일(현지시간) 미 대법원에서 승소했습니다.

대법원은 이날 8대1로 아베크롬비 측이 “인종ㆍ종교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인권법을 위반했다”며 사만다 엘라우프(24ㆍ사진)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대법원은 “취업 희망자의 종교는 고용주의 확인 여부와 관련 없이 채용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엘라우프는 17세이던 2008년 오클라호마 털사 소재 아베크롬비 매장에 취직하려고 했지만 모자를 착용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불합격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고객과 직접 만나는 판매가 아닌 상품 관리가 주 업무인데도 말이죠. 이후 시민단체인 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가 엘라우프를 대신해 아베크롬비를 제소했습니다.

2011년 법원은 엘라우프에게 2만 달러(약 2200만원)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지만 이후 2심 판결에서 아베크롬비 측이 취업 희망자로부터 종교에 대한 안내를 받지 못했다며 부당차별이 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대법원은 엘라우프의 손을 들어준 거죠.

사실 아베크롬비는 ‘차별’로 유명한 회사입니다. 제품 카탈로그에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모델만이 등장합니다. 흑인이나 아시아 계통 모델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앞서 2005년에도 채용 과정에서 인종 차별이 있었다는 지원자들의 집단 소송에서 패소해 5000만 달러를 배상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외모 차별은 대놓고 합니다. 1892년 창업자 데이비드 T 아베크롬비가 웃통 벗은 젊은 백인 남성을 모델로 내세운 이후 2013년까지 모든 매장에서 엑스스몰(XS)부터 라지(L)까지만 판매해 왔습니다.

지난해 12월까지 22년간 ‘황제’로 군림한 마이클 제프리스 전 최고경영자(CEO)는 2006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뚱뚱한 고객이 들어오면 물을 흐리기 때문에 엑스라지(XL) 이상의 여성 옷은 안 판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스몰 사이즈 정책을 고수하는 것에 대한 아베크롬비의 입장은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한 옷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 아베크롬비가 달라진 것 역시 실적 부진. 급락하는 실적에 2014년부터 XL 사이즈 이상의 옷을 만들었습니다. 제프리스 CEO는 지난해 12월 물러났고, 그가 고수하던 섹시 컨셉도 바꿨습니다.

아베크롬비는 지난 4월 “더 이상 체형이나 신체적 매력을 보고 점원을 뽑지 않을 것이며 점원의 명칭도 ‘모델’에서 ‘브랜드 대표’로 바꿀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아베크롬비의 상징이던 매장 앞 웃옷을 벗은 ‘몸짱’ 남성 모델들을 더 이상 두지 않겠다는 거죠.

다음달부터는 매장 내 커다란 포스터와 쇼핑백, 선물카드 등에 있는 벗은 몸짱 모델 사진도 없앨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반성이 너무 늦었던 걸까요. 변신에도 주가는 하락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1년 전 40달러를 웃돌던 주가는 현재 20달러로 반토막이 났습니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사진설명]
1) 아베크롬비에 소송 제기한 사만다 엘라우프
2) 벗은 남자 몸짱 모델로 유명한 아베크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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