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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베이스' 한 우물 파 성공 신화 쓴 실리콘밸리의 악동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래리 엘리슨(71) 오라클 회장은 세계적인 부자 기업인이다. 지난 3월 2일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543억 달러의 재산으로 5위에 이름을 올렸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792억 달러), 멕시코의 아랍계 기업인 카를로스 슬림(771억 달러),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727억 달러)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스페인 의류 브랜드 ‘자라’ 창업자인 아만시오 오르테가(645억 달러)의 뒤를 이었다.

오라클은 데이터베이스 분야에서 세계적인 강자다. 직원이 12만2400명, 주가 총액은 468억7000만 달러, 총 자산은 903억4000만 달러로 평가되는 거대 기업이다. 2014년엔 382억7000만 달러 매출에 109억5000만 달러의 세후 이익을 거뒀다. 그런 오라클의 이름이 생소하게 들리는 것은 소비자 상품이 아닌 기업이나 컴퓨터 업체 상대의 비즈니스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엘리슨은 1977년 오라클 창업 때부터 2014년 9월까지 37년간 최고경영자(CEO)로서 경영을 진두지휘했으며 CEO에서 물러난 뒤에도 회장 이사회 의장 겸 최고기술담당(CTO)으로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글로벌 영웅 시리즈 <46>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

히피들의 천국을 떠나 컴퓨터를 만나다

실리콘밸리의 초기 개척자의 하나인 엘리슨은 야망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그는 1944년 뉴욕의 맨해튼에서 유대계 미혼모와 미 공군 조종사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후 9개월 때 폐렴에 걸리자 생모는 양육을 포기했다. 엘리슨은 시카고에 사는 중산층 유대인 부부에게 입양됐다. 그는 48세에 성공한 기업인이 돼 생모를 만날 수 있었다.

양어머니는 따뜻하고 자상했으나 양아버지는 엄격하고 냉정한 성격이었다. 양부모는 독실한 개혁파 유대교 신자였으나 엘리슨은 13세 때 유대교 성인식 참석을 거부한 후 지금까지 종교가 없다. 스스로 “일부는 종교적이라”고 말하는데 회사 이름을 ‘신탁’이라는 뜻의 오라클로 지은 것도 이와 관련 있어 보인다.

엘리슨은 양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명문대인 어바나샴페인 일리노이대(공대·자연과학 명문)에 진학했다. 하지만 2학년 때 양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학교를 그만뒀다. 그는 당시 히피들의 천국이었던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여름을 지냈다. 히피는 물질 문명에 저항한 청년들로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했다. 그는 시카고대에 다시 입학했지만 한 학기 만에 중퇴했다. 그런데 이 한 학기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하고 그 가능성에 눈을 뜬 것이다.

데이터베이스의 사업적 가능성에 투자

시카고대를 그만 둔 22살의 엘리슨은 1966년 다시 캘리포니아 북부로 떠났다. 이번에는 목적이 전혀 달랐다. 히피가 아닌 IT맨으로 변한 것이다. 여러 회사에 다니며 컴퓨터 관련 일을 하던 그는 앰펙스(AMPEX)라는 전자회사에서 미국중앙정보국(CIA)를 위한 데이터베이스 구축 업무를 담당하면서 관련 세계에 새롭게 눈을 떴다. 앰펙스는 1970년대에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의 전자회사로 테이터베이스 시장의 개척자 중 하나였다.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엘리슨은 데이터베이스의 사업적 가능성을 확신하게 됐다.

1977년 동료 밥 마이너(1941~94)와 에드 오츠(69)와 함께 데이터베이스 업체를 창업했다. 마이너는 앨리슨이 중퇴한 어바나샴페인 일리노이대에서 수학을 전공했으며 IT업계에서 제품 설계로 잔뼈가 굵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였다. 오츠는 새너제이 주립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같은 업계에서 일했다. 앰펙스에서 만난 세 사람은 의기투합해 데이터베이스에 운명을 걸기로 했다. 창업 자본 2000달러 중 그가 1200달러를 부담했다. 지분 60%다. 나머지 지분은 두 사람이 20%씩 나눴다. 500억 달러가 넘는 지금의 재산은 이 작은 투자금에서 시작됐다. 창업한 곳은 캘리포니아 북부 샌타클래라이며 현재 본사는 레드우드에 있다. 모두 캘리포니아 북부 도시로 실리콘밸리의 일부다.

오라클은 IBM이 지배하던 데이터베이스 시장에 뛰어들어 치열한 경쟁 끝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는 DB2와 SQL/DS 데이터베이스로 시장을 좌우하던 IBM이 유닉스와 윈도우를 운영체계로 쓰는 중소형 데이터베이스 시장에 선뜻 뛰어들지 않고 머뭇거렸다는 이유도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사이베이스가 이 분야 시장을 선도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1996년 파워소프트와 합병하면서 자금난 등으로 차기 기술 개발에 주력하지 못하며 뒤쳐졌다.

지난 10년간 가장 높은 연봉 받은 경영인으로

사이베이스와 인포믹스가 무너지면서 엘리슨은 오라클의 대표로서 최고의 시대를 구가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사이베이스의 원천 기술로 무장한 ‘마이크로 소프트 SQL 서비스’가 도전해 왔다. 인포믹스의 소프트웨어를 사들인 IBM은 DB2를 내놨다. 이들은 모두 윈도우 운영체계에서 구동되는 데이터베이스다. 오라클은 윈도우 외에도 유닉스나 리눅스 체계에서 가동되는 데이터베이스로 대응했다. 오라클은 2009년 세계 4대 컴퓨터 서버업체인 미국의 선마이크로시스템즈를 74억 달러(약 10조원)에 인수했다. 이로써 시장에서 인기가 높은 MySQL 오픈소스 데이터베이스를 손에 넣고 새로운 도약의 길을 열었다.

2010년 엘리슨은 280억 달러의 재산으로 세계 6위의 부자에 올랐다. 이듬해인 2011년엔 365억 달러가 됐다. 1년 새 85억 달러나 불린 것이다. 고속으로 재산을 불리는 기업인으로도 유명세를 얻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010년 엘리슨을 지난 10년간 가장 높은 연봉을 받은 경영인으로 꼽았다. 10년간 그가 받은 급여는 18억4000만 달러다. 2014년에도 재산을 57억 달러나 불려 한 해 재산을 증식한 순위로 세계 9위에 올랐다.

오라클은 실리콘밸리가 오늘날의 세계적인 벤처타운이 되는 바탕이 된 기업의 하나다. 엘리슨은 그 실리콘밸리 성공신화의 개척자다. 1970년대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최후의 현역 경영자이기도 하다. 평소 정치나 사회, 경영에 대한 소신 발언으로 이름 높았던 그가 어떤 일을 벌이고 세상에 개입할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정지원 자유기고가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엘리슨이 걸어온 길

1944년 8월 17일 유대계 미혼모 어머니와 이탈리아계 미국 공군 조종사 사이에서 뉴욕시에서 태어남.

1945년 생후 9개월 때 폐렴에 걸리자 어머니는 친척에게 엘리슨을 입양시킴.

1959년 유대인 중산층이 모여 사는 시카코 사우스 쇼어로 이사.

1966년 시카코대에서 컴퓨터 디자인을 접하고 캘리포니아로 떠남.

1977년 밥 마이너, 에드 오츠와 함께 데이터베이스 업체 ‘소프트웨어 개발 연구실(SDL)’ 창업.

1979년 회사 이름을 '릴레이셔널 소프트웨어'로 바꿈.

1982년 ‘오라클 시스템스’로 변경.

1986년 나스닥에 주식 상장

1995년 처음으로 64비트 DBMS를 선보이며 현재 이름인 '오라클(Oracle Corporation)'로 변경.

2000년 자회사 오라클모바일 설립, 휴대전화 사업에 진출.

2009년 세계 4대 컴퓨터 서버업체인 선마이크로시스템스를 74억 달러에 인수

2013년 기존 오라클 DMBS에 인메모리 기능을 옵션으로 넣은 ‘오라클 DB 12c 인메모리 옵션’ 발표

2014년 6가지 새로운 오라클 클라우드 플랫폼 서비스 출시

기부에도 힘쓰는
‘악동’ 엘리슨

엘리슨은 지금까지 재산의 1% 이상을 기부했다. 재산의 대부분을 자선활동에 내놓자는 ‘기부 서약’에도 서명했다. 이 서약은 2010년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가 전 세계 억만장자를 대상으로 시작한 운동으로 지난 1월까지 전 세계 128명의 억만장자가 동참했다. 엘리슨은 의료 연구 분야 기부에 열성적이다. 1992년 자전거 충돌 사고로 팔꿈치를 심하게 다친 것이 계기다. 당시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의대 병원 정형외과의 마이클 채프먼 교수의 열정적인 치료로 말끔하게 회복됐다. 감동한 엘리슨은 5000만 달러를 내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로렌스 J 엘리슨 근육골격센터’가 들어섰다. 그의 이름을 딴 정형외과 의학연구센터다. 1998년에는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 메디컬 센터의 세크라멘토 캠퍼스에 ‘로렌스 J 엘리슨 보행 관리 센터’가 세워졌다.

꾸준한 기부에도 불구하고 요란한 취미 생활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곤 해 ‘실리콘밸리의 악동’으로도 불린다. 자동차·요트·비행기·저택 수집이 그의 취미다. 요트에 탐닉해 개인이나 팀으로 각종 대회에 참가하면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승부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거액을 들여 세계적인 선수를 초청해 순위를 끌어올리는 것도 예사다. 건조에 2억 달러가 들었다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큰 요트 ‘라이징 선’을 보유하고 있다 2010년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데이비드 게펜에게 팔았다.

비행사 면허도 갖고 있다. 2000년 새너제이 공항에서 심야 이륙 금지 규정을 어기고 비행기를 몰다 지적 받기도 했다. 이탈리아제 군용 훈련기를 보유하는 등 군용기도 수집 대상이다. 퇴역한 옛 소련제 미그-29기를 구입했으나 미 항공당국이 불허해 미국에 가져오지는 못하고 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우드사이드에 있는 1억1000만 달러짜리 대저택에서 거주하고 있다. 북미 최대 규모의 일본식 건물이기도 하다. 하와이주에서 여섯째로 큰 라나이 섬의 부동산 98%를 보유하고 개인 골프 코스도 갖고 있다. 4차례 결혼하고 4차례 이혼하는 등 가정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1남1녀(데이빗·메건)를 두었는데 모두 할리우드에서 영화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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