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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성폭력에 직접 대응 나선 서울대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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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국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손국희
사회부문 기자

“학교만 믿었다간 학내 성폭력을 뿌리 뽑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컸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우리 스스로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판단했어요.”

 서울대 주무열(30·문리천문학부) 총학생회장은 26일 총학 산하에 ‘학생·소수자 인권위원회’ 신설을 추진하는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학생들이 직접 진상조사를 하고 관련 사례를 수집해 재발 방지에 나서겠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이와 맞물려 총학이 직접 운영하는 성폭력 신고센터 ‘속마음 셔틀’도 확대 운영키로 했다. 인권위 신설을 위한 회칙 개정은 28일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서 이뤄진다.

 서울대는 최근 교수들의 잇단 성추문으로 홍역을 앓았다. 지난해 5월 성추행 물의를 빚은 성악과 A교수는 파면됐다. 경영대 B교수는 제자를 상습 성추행한 혐의가 드러났다. 이달 초 서울대 인권센터는 B교수를 중징계하라고 학교 측에 권고했다. 상습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수리과학부 강석진 교수는 지난 14일 법원에서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대부분 ‘스승과 제자’라는 특수 관계를 악용한 권력형 성폭력 사건이었다.

 최근 실시된 학내 설문조사 결과도 심각하긴 마찬가지다. 학생 200명 중 33명(16.5%)이 ‘성폭력과 관련한 불쾌한 일을 경험한 적 있다”고 응답했다. 이쯤 되면 ‘지성의 전당’이란 표현이 민망할 정도다.

 “지방에 사시는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걱정스러운 말투로 요즘 학교에 별일 없느냐고 하시데요.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 학교에선 대체 뭘 한 건지….”(최모씨·경영대 4학년)

 대학 캠퍼스가 성폭력 사건으로 얼룩진 데는 학교 측의 늑장 대응도 한몫하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사건 발생 후 한참이 지나서야 조사를 시작하고 가해자에게 뒤늦게 징계를 내리는 사후약방문 식 조치가 반복되면서다. 서울대 인권센터가 운영 중이긴 하나 학생들이 이용을 꺼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센터장이나 심의위원회가 주로 교수들로 구성돼 있어 교수에게 당한 성폭력 문제를 터놓고 얘기하기가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실제 강석진 교수 사건 당시 속앓이를 하던 여학생 피해자들은 인권센터 대신 단과대 학생회장 연석회의를 찾아가 실태를 알렸다. 총학생회의 역할도 해당 교수들의 파면을 요구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학생들이 ‘우리 인권은 우리가 지키자’고 나선 배경이다.

  대학생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스승들의 성폭력 범죄에 시달려야 한다는 건 참 부끄러운 일이다. 서울대생들의 고육지책이 성추문 얼룩을 씻어내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손국희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