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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가족] 노년닭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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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노년의 닭살 부부 세 쌍 “고소~한 맛 좀 보실라우?

1973년 63.1세에 불과하던 평균 수명이 2003년엔 77.5세로 껑충 뛰었다. 그만큼 우리 삶에서 '노후'가 차지하는 비율이 늘고 있다. 반면 자식도, 부모도 '동거'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게 대세인 듯하다. 지난달 서울시가 서울시민 5만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노후에 자녀와 함께 살고 싶다'는 응답은 11.1%에 불과했다. 자녀가 노후 보장책이던 시절에도 통했던 '효자불여악처(孝子不如惡妻)'가 더욱 절절해졌다. 노년에는 '반쪽'이라고 여겼던 아내와 남편이 '전부'가 된다. 그래서일까. 젊은 부부 못지 않은 '닭살 커플'을 자처하는 노년 부부가 늘고 있다. 저마다 '제2의 청춘'이라고 입을 모은다.

자식이 아무리 잘 해도 아내만 하랴. 남편만 하랴. 평생 미운 정 고운 정 쌓으며 동반자로 살아온 부부는 늘그막을 윤기나게 보낼 최고의 짝이다. 서울 등촌동 서울시니어스타워에 살고 있는 유승헌(右)·김숙종씨 부부는 “부부가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며 즐거워한다. [사진=안성식 기자]

‘양로원’에 신방 차리고 친구 사귀고

▶ 유승헌(의사·84)

내년이면 결혼 60주년입니다. 집사람(김숙중 .80)과 4남매를 키웠죠. 모두 잘 지냅니다. 그런데 저희 부부는 자식들과 따로 살아요. 3년 전에 둘만의 공간을 마련했거든요. 무슨 '신방'이라도 차렸느냐고요? 하하하,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소위 '실버타운'으로 불리는 서울시니어스타워(서울 강서구 등촌동)에 입주를 했어요. 살던 집을 처분하고 분양을 받았죠.

처음에 친구들은 이해를 못 했어요. "평생 의사로 일했겠다, 자식들 번듯하게 키워놓고 왜 '양로원'에서 고생하느냐고요." 그런데 요즘은 태도가 180도 달라졌어요. 동창회에 나가면 다들 "좋겠다"고 난리에요. 집사람은 더해요. 친구들이 "정말 밥하고 빨래하는 데서 해방이구나"라며 부러워하죠. 여기에선 호텔 수준의 서비스가 제공되거든요. 식사와 청소, 각종 취미 프로그램에 세심한 의료 서비스까지 빈 틈이 없죠. 자식보다 낫다 싶을 때가 종종 있어요.

그리고 저희 둘만의 시간이 많아졌어요. 절로 대화가 늘더라고요. 며칠 전에는 집사람이 속병이 나서 죽만 며칠 먹었어요. 이유없이 저도 배가 아프더군요. 함께 죽을 먹었죠. 주위에선 아픈 것도 나눈다며 '닭살 부부'래요.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얘기겠죠.

이곳에선 다들 연배가 비슷해요. 살아온 시대가 같다 보니 몇 마디만 건네도 금방 친구가 돼요. 전에 단독 주택에서 살 땐 새로운 친구 사귀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죠. 아무리 죽마고우라도 먼저 세상을 뜨면 소용이 없잖아요. 친구가 많아지니까 부부 사이도 활력이 절로 돌더군요. 그제야 깨달았어요. 노후 설계는 정말 중요하구나. 그게 노년의 행복을 좌우하는구나. 아참, 내일이 제 생일이에요. 이곳에 입주한 200명 모두에게 떡을 돌릴 참이에요. 이곳 식구들도 제 가족이니까요. 물론 아이들과는 외식을 할 참입니다.

남편과 춤을 … 병치레 끝, 행복 시작

▶ 황순희(61·전직 교사·사진)

20년 동안 교단에 섰어요. 고교에서 수학을 가르쳤죠. 그 때문에 퇴직할 땐 무릎 관절이 많이 상했어요. 앉았다가 혼자 일어서지 못할 정도였죠. 남편(이병균.68.사업 후 은퇴)은 당뇨가 심했어요. 그땐 퇴직 후 생활이 아주 힘들었어요. 길을 가다가 우연히 '강동노인종합복지관'을 봤어요. 저희는 노인복지관이 불우한 노인만을 위한 곳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스포츠댄스 강좌가 눈길을 끌더군요. 잠시 망설이다 남편과 함께 등록을 했어요. 이후 저희 부부의 노년은 '고통 끝, 행복 시작'으로 돌변했죠.

"그 나이에 무슨 춤바람이냐." 친구들은 그래요. 모르고 하는 얘기죠. 아침 7시에 일어나 남편과 저는 간편한 댄스복으로 갈아입어요. 거실에서 음악을 틀고 정중하게 서로 인사를 하죠. 그리고 삼바.차차차.룸바.자이브까지 30분간 춤을 춥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요. 너무 목이 말라 작은 생수 한 병을 한번에 들이킬 정도죠. 그런 다음의 아침 식사는 정말 꿀맛이에요.

스포츠댄스를 배운 지 벌써 만 2년이 됐네요. 처음에는 동작이 틀려서 강사님께 지적을 받으면 너무 창피했죠. 그래서 남편과 더 열심히 췄어요. 그게 저희에겐 '보약'이었죠. 저는 요즘 격렬한 춤도 어렵지 않게 소화할 만큼 무릎이 좋아졌어요. 남편은 당 수치가 386㎎/㎗에서 식전 105, 식후 130㎎/㎗로 뚝 떨어졌어요. 정상 수치죠. 물론 얻은 것은 건강만이 아니에요. 춤을 시작하면서 남편과 손을 살짝 맞잡을 때의 긴장감은 노년에 다시 느끼는 설렘이죠. 함께 추는 춤, 이보다 멋진 애정 표현이 또 있을까요?

영감님 만나 재혼·여행 … 소원 풀었죠

▶ 박혜숙(67·주부·사진)

이제 다음달이면 결혼 12주년입니다. 내 나이 쉰다섯, 영감님(정희채.76.사업 후 은퇴) 예순넷에 원삼 입고 족두리 쓰고 결혼식을 올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세월 금방이네요. 그땐 잘한 선택인지 확신이 없었는데, 이렇게 걱정 없이 재미나게 살고 있으니 백번 잘한 결혼이지요. 사실 전 첫 남편이 결혼 3년 만에 병이 나 12년을 병석에 누워 있다 세상을 떠났을 때부터 재혼하리라 결심했어요. 병구완에 가버린 내 청춘이 아까워 나도 다시 결혼해 남들처럼 알콩달콩 살아보겠다고요. 그때 나이 마흔. 결심은 그렇게 했지만 혼자 3남매를 키우느라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정신없이 살았지요. 그러다 취미 생활하러 다니던 원우문화센터에서 회장님의 소개로 영감님을 처음 만났을 땐 솔직히 '이 사람이다'싶진 않았어요. 나이도 아홉 살이나 많고 집도 없고 건강도 안 좋고…. 그래도 "같이 살자"는 영감님의 프러포즈에 마음이 흔들린 걸 보면 우린 천생연분이었나 봐요.

보증금 1000만원, 월세 10만원짜리 지하방에서 시작한 신혼살림. 둘이 5년 동안 기원에서 열심히 일해 아파트도 샀고, 이젠 거기서 나오는 월세로 자식들한테 손 안 벌리고 살게 됐으니 재테크도 잘한 셈이지요. 또 영감님과 온양온천.설악산.제주도 등 전국 곳곳 안 가본 곳 없이 여행도 많이 했어요. 또 5년 전엔 태국으로 해외여행도 갔다왔지요. 영감님 만나 평생 소원 푼 격이랍니다.

재혼을 안 했더라면 자식만 의지해 사는 노후가 얼마나 쓸쓸했을까요. 1년 전 제가 척추수술을 받고 꼼짝없이 누워 있을 때도 영감님이 대.소변까지 다 받아내며 간호해줬지요. 지금도 무거운 건 절대 못 들게 하네요. 요즘은 정말 사는 게 재미있어요. 저녁 먹고 심심할 땐 같이 바둑도 두고, 고스톱도 치고, 노래방도 가고, 또 영감님이 켜는 아코디언 소리에 맞춰 노래도 부르고…. 혼자 사는 노인들한테 더 늦기 전에 재혼을 권하고 싶네요.

이지영.백성호 기자 <jylee@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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