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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124>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 (57)|「매신」기자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2층에 자리잡은 영자신문인 일간지『서울 프레스』편집국장은「프랭크·Y·김」이라는 서양이름을 가진 김용주였다. 미국에 오래 있어서 영어를 썩 잘 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김윤정이라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구한말 주미공사였는데, 한국을 도와달라고 미대통령을 만나러 간 이승만을 여러가지로 방해해서 이승만이 절치부심해온 친일파였다. 해방후 이승만이 서울에 오자 김윤정이 그때 일을 사과하려고 조선호텔로 이승만을 찾았으나 이승만은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 신문사에는「프램톤」부인이라는, 영문의 틀린 것을 고쳐주는 촉탁이 있었다. 늘 검정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DIA전한 늙은 부인이었는데, 남편이 이 신문사에 있었고 남편이 죽자 부인이 검은 상복을 입고 대신 나와 일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 부인한테 영어 모르는 데를 많이 물어 배웠다.
매일신보는 편집국장이 이익상, 정치부장이 이상철, 사회부장이 정인익이었다.
이상철과 정인익은 다 중외일보에 있다가 온 사람인데, 이상철은 해방후 고향인 청양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어 장면 내각때에는 내무장관까지 지낸 사람이다. 매일신보 정치부장으로 총독부에 출입하면서 기사는 한줄도 안쓰고, 고등교제만 하고 다닌다고 유명했었다.
정인익은 이서구·김동진·김을한·서범석과 함께 사회부의 명기자로 날리던 풍류남아였다. 매일신보 편집국장때 해방이 되자 그는 즉시 부하들을 데리고 나와 자유신문을 발간하였다. 사장에 신익희를 추대하고 자신도 장차 정계에 나설 야심을 품고 있었는데, 불행히 사변때에 납치되었다.
학예부에는 아무도 없고 이승만 혼자서 시문소실의 삽화와 각면의 커트·지도같은 것을 그리고 있었다. 호는 행인인데, 머리통이 작다고 해서 이서구가 살구씨, 행인이라고 별명겸 아호를 지어준 것이다. 양화가 출신으로 1930년 이전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 속칭 선전에서 연거푸 특선을 따내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매신에 입사해서는 양화를 집어치우고 소설 삽화만 그렸는데, 나중에 월탄 박종화와 콤비가 되어 역사소설의 삽화를 그릴 때에는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본떠 요염한 여인을 그려 독자의 흥미를 끌었다.
나와는 그때부터 사귀어 1975년 그가 별세할 때까지 40년의 친교를 계속하여 왔다.
내가 학예부에 들어가서 단 두사람 뿐이므로 나는 늘 행인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그를 통해 그의 휘문 동창인 월탄 박종화를 알게 되었고, 월탄 집에서 모이는 술좌석에 참석해 거기서 횡보 염상섭 백화 양건식·춘해 방인근·안서 김억·빙허 현진건· 수주 변영노·정지용 가람 이병기등을 알게 되었고, 화가로 묵노 이용우 정재최우석·철마 김중현·청전 이상범 심산·노수현등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월탄은 「잼배」라고 부르는 서울역 뒤에 살고 있었는데 집이 고가이지만 몇십간이 되는지 퍽 컸었다.
광 (창고) 만 해도 크고 작은 것이 무수해서 우중충하고 도깨비가 나올것 같았다.
월탄은 문단에서 제일 부자여서 그는 80평생을 호화롭게 삶다가 간 사람이었다. 살림이 넉넉하므로 술을 잘 냈고 궁한 친구들이 툭하면 그의 집으로 토주하러 갔다.
토주뿐만 아니라 그는 한달에 한두번씩 안주를 잘 차려놓고 친구들을 불렀다. 그러면 위에서 열거한 문인과 화가들이 봉래정 그집으로 좋아라고 모여들었다. 많은 때는 거의 열사람, 작은 때라도 5, 6명이 모여 좋은 안주에 부어라 마셔라 밤새도록 술타령을 하는 것이었다. 월탄부인은 음식솜씨가 퍽 좋아 산해진미를 다 만들어 큰상 가득히 내놨다. 모두들 잔뜩 속이 궁한 판이라 영양을 보충한다고 그릇을 부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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