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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끝자락 천년고찰서 자신의 뒷자락 바라보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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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강진 백련사를 찾은 외국인들이 참선 체험을 하고 있다. 이 절에선 ‘남도기행 템플스테이’란 주제로 연중 체험 프로그램이 열린다. [사진 프리랜서 오종찬]

“한 번쯤 남도 끝자락에서 자신의 뒷자락을 바라보세요. 삶이 한결 풍요롭고 건강해집니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白蓮寺)는 신라 문성왕 때인 839년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강진만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사찰에선 800여 년 전 불교의 역사를 바꾼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고려 후기 귀족불교에 맞서 민중을 아우르려한 백련결사운동이다. 참회와 염불을 통해 현생을 부처와 보살이 사는 정토(淨土)로 바꾸려한 최초의 민간결사 운동이다. 원묘국사 요세(了世, 1163~1245)가 주창한 후 불교의 세속화와 사회모순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원묘국사를 시작으로 고려 후기에만 8국사(八國師)가 배출된 으뜸 절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백련결사가 시작된 1232년부터 120여 년간 8명의 국사가 나와 불교의 중흥을 이끌었다. 8국사란 원묘국사·정명국사·원환국사·진정국사·원조국사·원혜국사·진감국사·목암국사다.

지금도 백련사에서는 고승들을 기리기 위한 8국사(八國師) 다례문화제가 매년 5월 열린다. 조선시대에는 왕위를 동생 세종에게 양보하고 전국을 유람한 효령대군이 8년 동안 기거했던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조선 후기에는 다산(茶山) 정약용이 아암(兒庵) 혜장선사와 인연을 맺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백련사를 지켜온 여연(사진) 스님이 지난 16일 이 절에 대해 유쾌하고도 현대적인 해석을 내렸다. 백련사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앞만보고 달리던 사람들이 잠깐이라도 와서 삶의 뒤끝자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면 족하다”고 했다. 성공이나 물질적인 풍요만을 쫓는 현대인들에게 휴식과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깨우쳐주려는 메시지다. 그는 “옛 사람들은 나무그늘에 앉아서 쉬며 자신을 돌아보곤 했는데 요즘은 그런 지혜가 없다”고 했다. 또 “삶에 지친 이들이 절에 와서 쉬면서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해가면 좋겠다”고도 했다.

스님은 백련사의 역사에 대해선 “민중의 아픔을 보듬으려했던 옛 스님들이 노력을 많이 한 곳”이라고 했다. 백련결사로 대변되는 이 절의 역사적 중요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당시 백련사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운동은 몽고와 왜구의 침략으로 고통받던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줬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지나간 역사보단 현재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백성들이 예전보다 잘 살게 됐으니 이제는 물질보단 삶을 풍요하게 만드는 공간이 돼야한다”고 했다. 그는 2008년부터 6년간 백련사의 주지를 지낸 뒤 현재는 절의 법회를 주관하는 회주(會主)를 맡고 있다. 우리나라 차문화를 중흥시킨 초의선사의 맥을 이어받아 지난 40여 년간 차문화 보급에 앞장서온 차의 대가이기도 하다.

만덕산 자락에 들어선 고찰에선 연중 탬플스테이가 열린다. 차를 주제로 한 다산과 아암의 인연을 직접 체험할 수 있어 찾는 이들이 많다.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간의 우정 얘기도 접할 수 있다. 아암과 초의선사가 걸었던 옛길을 따라가는 ‘남도기행 템플스테이’란 프로그램은 지난해에만 1700여 명이 참여했다. 작은 금강산으로 불리울 정도로 주변의 풍광이 좋아 전국에서 탐방객들이 몰린다. 다도체험과 약산도·생일도 등을 두루 돌아보는 특별 템플스테이도 수시로 열린다.

여연 스님은 “절에 와서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서지 말고 단 2~3분 만이라도 바위나 나무그늘에 앉아서 자기자신을 한 번쯤 돌아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요즘처럼 사랑이 넘치는 세상에서 오히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자기도 사랑 안하는 사람이 남을 어떻게 사랑한다는 것인지…”

강진=최경호 기자 ckh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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