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6)제81화30년대의 문화계(49)「극연」8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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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극연」의 제1기 공연중에서 특기할 것은 축지소극장에서 상연해온 번역극을 그대로 조선말로 옮겨 상연한 무수한 번역극 속에 유치진의 창작극 『토막』 (2막)과『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 이 들어 있는 점이다.
유치진은 「극연」 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극작가였다.
그는 연출가로서도 홍해성에 못지 않은 역량을 가지고 있어 홍해성이 「극연」을 물러난 뒤 줄곧 연출을 담당해왔다.
「극연」의 동인중 대부분의 사람이 다른 직업을 가지고 연극을 부업으로 삼아왔지만 유치진만은 시종일관하여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연극에만 몰두한 사람이다.
나하고는 「극연」 을 만들 무렵부터 가까운 사이가 되어 그가 남대문안 좁은 골목에 있는 어두컴컴한 하숙집에 있을 때부터 자주 그 하숙집에 놀러 갔었다.
그는 나한테 절곡을 쓰라고 권고하였고, 처음으로 졸작 『가보세』 를 발표하자 배재고보 연극반에서 유치진의 연출로 그것을 무대에 올려 주었다.
내가 구인회를 만들 때 여러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회원으로 추천해 넣었는데, 유치진은 발회식때 나와서 여러 사람과 인사를 하고 앉았다가 끝나고 나와서 헤어질 때 나를 붙들고 『아무래도 나는 이모임에 어울리지 않으니 그만두겠다』 고 말하고 가버린뒤 다시는 구인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유치진이 구인회 탈퇴제1호였고, 그 다음에 이종명·김유영이 두번째로 탈퇴했다.
내가 유치진의 구인회 입회를 고집한것은 영화인인 김유영을 넣은 이상 연극인도넣어야 평형이 맞지 않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치진은 연이어 창작극을 발표했는데, 『빈민가』 『소』등이 모두 역작이었지만, 두작품이 압박받는 현실속에서 울부짖는 우리의 처지를 너무 노골적으로 그렸다고 해 경찰이 말썽을 일으켰다.
이때문에 그는 방향을 바꾸어서 암담한 실생활 보다는 애정문제를 다룬 『당나귀』 『제사』 『자매』 『부부』 등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서 유치진 자신도 『그것은 당시의 작가적 입장으로서 하나의 도피였기 때문에 작품으로서의 탄력이 거세됨을 면치 못했다』 고 고백하고있다.
다시 「극연」에서는 1936년9월에 창립5주년 기념공연으로 유치진 각색의 『춘향부』 (4막11장) 을 상연했는데, 경찰은 이『춘향부』 에서 계급의식을 강조했다고 하여 유치진과 이헌구를 문초했다.
이리하여 경찰은 「극연」을 일종의 사상단체로 몰아붙이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경찰의 트집과 압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극예술연구회」 의 「연구」 란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것 같았다.
「극연」 이 사상단체임에 틀림없고 「후인들은 민족사회주의자임에 틀림없다고 고집하도록 드디어 그들의 압력에 못이겨 연구단체인 「극예술연구회」 를 해체했다.
그리고 새로 연극을 전문으로하는 직업단체인 「극연좌」를 창립했는데, 동인들이 다 나가고 유치진과 서항석만이 남아 남은연기자들을 이끌고 직업극단으로 새로 출발했다.
이때가 1938년 8월이었다.
「극연좌」 에서는 다시 기력을 가다듬어 동경학생예술좌 출신의 우수한 연기자인 김동원·이해랑·이진정등을 가입시켜 『목격자』『깨어서 노래부르자』 등의 번역극을 상연했는데, 『재래의 연구극단에서 하던 선을 넘어 연극의 극장적 연출에 성공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1939년에논 함세덕작 『도념』(1막) 과 『목격자』 등을 재상연했는데, 문화계 전반에 걸친 경찰의 탄압으로 5월에 결국 「극연좌」 도 해산해버렸다.
이것으로 1932년7월에 발족한「극예술연구회」는 8년간에 걸쳐 우리나라 신극운동에 불후의 공적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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