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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진씨(글 사진 김창욱기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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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진씨는 「풍기」와 「진주」를 각각 본관으로 하는 두파가 주류를 이룬다. 이밖에 「삼척」 「영춘」 「용인」 「평강」 「남원」 본관의 소파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진씨의 90%는 풍기진씨다.
풍기주씨의 시조는 당나라 병부시랑이었던 진필명-. 그는 신라 무열왕7년 소정방등과 함께 나당연합군의 장수로 참전, 백제를 공략하고 백제가 멸망하자 신라에 귀화, 우리나라 진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후 고려조에서 그의 후손 진질명(의종·문하좌시중)이 정중부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기주(풍기의 옛지명) 부원군에 봉해지자 「풍기」를 본관으로 삼았다. 이때 그의 두형 진질직, 진질황등도 공을 세워 낭주군·영원군 등으로 봉해지는데 이들은 「삼척」 「영춘」 파의 파조가 되었다 한다. 이들 3파중 풍기진씨가 수적으로 가장 많고 이들은 주로 경북예천·영주·의성, 경남거창, 제주도 등지에 분포돼 살고있다.
한편 진주진씨는 고려말엽 박사보리공신으로 진주군에 봉해진 진욱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는 공자의 제자로 우리나라 문묘에 배향된 진상의 후손이다. 따라서 진상은 진주진씨의 원조가 되는 셈이다.

<제주에도 많이 살아>
진주주씨는 90%가 제주도에 살고있다. 이 때문에 진주진씨를 제주진씨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 나라 진씨중 제주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인물은 고려 공민왕때 우삼찬 진계백이다. 그는 당시 권력을 장악했던, 홍륜·최만성등이 모반을 계획하자 화를 면하기 위해 제주로 피신, 입도시조가 되었다. 조선초엽에 이르러 그의 7세손 진인규(판포파조)·진인한(명월파조)·진의한(납읍파조)등 3형제대에 와서 거주지를 중심으로 3파로 나누어진다. 일제 말까지도 이들 3파는 똑같이 「진주」를 본관으로 진욱을 시조로 받들었다.
그러나 해방후 맏이인 판포파와 막내인 납읍파 등 두 집안은 ▲진주진씨는 제주도에만 국한되어 살고있으며▲진씨에 관한 문헌을 조사, 진주진씨 또한 진필명의 후예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지난 60년 법원의 적격판결을 받아 호적상의 본관을 「풍기」로 정정하는 한편 우리 나라 모든 진씨는 동성동본으로 보고 본관통합운동을 벌여왔다. 그러나 둘째인 명월파는 아직도 「진주」를 관향으로 고수하고 있다.
우리나라 모든 진씨가 동성동본인지의 여부는 현존하는 문헌으로는 고증하기 어렵다.
1천년이상의 씨족사를 이어온 진씨는 고려의 명문이다.
진경(내천부령), 진정(진각성령)등이 왕건을 도와 고려건국에 공을 세운 이후 진극희(상서좌복사), 진자윤 (대장군), 진세준(평장사), 진관유(목종·집현전대제학), 진중기(평장사), 진계춘(인종·좌정승), 진원(충렬왕·좌우위보승장군·풍기주씨 중시조), 진효정(충환왕·이부상서경보 문각대제학), 진현석(정종·병마사), 진량필(충숙·지밀직사사)등 명현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선개국 후 「진문」은 다소 쇠퇴한 느낌이다.
진활(대종·양양부사), 진유경(세종·대사간·예조참의·예문관직제학), 진흠조(한성판관), 진승조(강원도관찰사), 진지민(형조좌랑), 진국태(명의)등이 조선의 인맥들-. 이들중 진국태는 의술에 정통해 세상에 명성을 날렸다. 진재해는 영조대의 이름난 화가. 유명한 『월하취적도』를 남겼다. 진익채는 영조∼정조대의 문인으로 시와 글씨,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진문은 항일운동사에도 매운 자취를 남겼다. 19세때 만주로 망명,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정의부독입군으로 활약했던 진성국은 그 대표적 인물. 그는 옥고 18개월만에 출옥했으나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23세에 숨졌다.
전국에 약1천2백여가구. 인구는 8천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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