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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못났어요, 고백 … 그러니 힘이 솟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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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 압구정성당의 장애인 화가 최창원씨가 자신이 그린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초상화 앞에서 평화롭게 미소짓고 있다.
[최정동 기자]

도심의 성당은 참 고요하게 느껴진다. 오후 4시 무렵엔 더 그렇다. 저녁을 맞이하는 영성이 감돌고 있기 때문일 게다. 서울 압구정성당에서 사는 최창원씨(45)는 그 고요 속을 무성영화의 배우처럼 움직인다. 150cm를 약간 넘을 듯한 키, 게다가 마른 몸에 등이 많이 굽어 더욱 작아 보인다. 왼쪽 귀는 안 들리고 오른쪽 귀엔 보청기를 끼었다. 소의 눈망울처럼 큰 눈 또한 고요하고 깊다.

최씨는 성당에서 그림을 그린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매주 내는 '서울주보'의 '간장종지'면의 컷을 그린다. 짧은 시와 그림이 어울려 보는 이를 성찰로 이끄는 작은 고정물이다. 그는 또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매주 한 장씩 연필화로 만들어 압구정성당에 전시한다. 필치가 섬세하고도 힘차다. 그의 꿈은 교회미술로 복음 전파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거리를 떠돌던 남루한 그의 영혼을 구원한 곳이 성당이기 때문이다.

최씨는 서울대 미대를 나왔다. 불운은 대학 1학년 때 찾아왔다. 작은 체구로 인한 사춘기 열등감의 터널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때였다. 설악산을 오르다 넘어져 바위에 부딪힌 것이 척추가 경직되는 병으로 이어졌다. 몇 년 후엔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10년을 누워있다 1994년 세상을 떠났다. 이 직후 어머니마저 같은 병으로 쓰러져 결국 충북 음성의 꽃동네에 모셨고 2001년 거기서 숨졌다. 광산업을 하던 아버지였고 명문여대의 불문학 교수였던 어머니였다. 어릴 적부터 살던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졸업 후 다니던 출판사의 디자인 일도 96년 접고말았다. 그나마 조금 남은 퇴직금은 친구의 빚 보증을 섰다가 날렸다. 고스란히 거리에 나앉은 병약한 그에게 마침내 귀까지 안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나 열등감을 느끼는 것들을 두서너 개는 가지고 산다. 하물며 최씨에게 있어서랴. 때문에 교회와 사찰과 성당이 있다. 우리가 부처님과 예수님을 경배하는 이유는 '저 잘났어요'를 자랑하려는 게 아님은 물론이다. '저 못났어요'를 고백하고 참회해 구원의 은총을 받으려고 기도하는 것이다.

절벽 끝에서 최씨는 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이를 본 주교회의 상담자인 한정식씨가 그를 신앙으로 인도했다. 이듬해 면목동 성당에서 한씨를 대부로 모시고 영세를 받았다. 2002년 봄의 일이다. 종교는 그렇게 사람을 바꾼다.

"굳게 믿는 마음이 내 안에 가득해지니까 크고 작은 걱정들이 없어졌어요. 오묘한 과정을 거쳐 이제는 미래에 있을 것들이 잘 잡혀있는 느낌입니다." 미래의 일이란 물론 교회미술과 봉사활동에 몰두하는 것이다.

3년 전 압구정성당에 오기까지 최씨는 건물의 한구석, 친구의 사무실 등에서 잠을 청했다. 그런 어느 날 최씨가 신사동의 한 식당에 들른 게 압구정성당과 인연이 됐다. 이 인연은 성화의 한 장면 같다. 폐인처럼 보이는 그에게 주인 아주머니 김홍숙씨(62)가 말을 건다. "어쩌다 이렇게…." 밥을 앞에 놓고 그는 그 크고 슬픈 눈으로 아주머니를 물끄러미 본다.

김씨는 자신이 다니는 압구정성당으로 그를 데려가 성당의 봉사단체인 빈첸시오회 부회장인 강정자(64)씨에게 소개했다. 숙소와 식사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또 최씨의 손에 그림도구가 다시 잡히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홍숙씨와는 의남매가 됐다.

그는 올해 말 그동안 그린 120여 점으로 본격적인 전시회를 연다. 성당에서는 그의 그림을 토대로 주일학교 교재를 만들 계획이다.

"나의 아픔을 남에게 이야기하며, 남의 아픔을 귀담아 듣고, 힘들수록 나를 숙이고 들어가면 정말 조그마한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내로라 하는 명사들의 새해 소망보다 그의 말의 울림이 더 크게 들린다.

글=이헌익 문화담당기자 <leehi@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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