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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7)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0)-영문과 한국학생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영문과에는 최모·현모 이외에 또 두사람이 있었는데, 한사람은 정준모라고 해방전에 중앙 불교 전문학교선생을 지냈고, 해방후에는 동국대학교 영문학과 선생을 하다 사변 때 납북 당한 사람이었다. 또 한사람은 조규선인데, 이 사람은 창작에 뜻을 둔 소설가 지망자로서 내가 2학년때에 그와 함께 「낙산문학」을 발간할 작정으로 돈줄을 트기 위해 그와 친한 국문과학생 김재철과 연락을 취하게 하였지만 조건이 맞지 않아 실패한 일이 있었다.
「낙산문학」이야기는 뒤에 나올 터이지만, 조규선은 그 뒤 졸업을 하고 간도에 있는 동명여학교로 영어선생이 되어 가더니 얼마 후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사람들이 내 윗반 사람들이고, 그 윗반에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효석이 제일 뛰어났다. 이효석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 출생으로 제일고보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예과 A에 입학하였으나 학부에 올라 갈 때 법과로 가지 않고 문과로 과를 옮겨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일찍부터 문재를 나타내어 제일고보 5학년때에 매일신보의 신춘문예 작품모집에 입선하였고, 대학 2학년때부터 당당한 신진작가로 등장하였다. 이밖에 한사람 김용환은 해방후 사범대학 영문과교수로 있었고, 또 한사람 김영준은 졸업후 사망하였다.
그 윗반은 영문과 제1회 졸업생으로 내가 학부에 올라갔을 때에 이미 졸업하고 없었다. 모두 다섯 사람인데 지금 세사람이 생존해 있다.
채관석은 수석졸업생으로 경기중학, 즉 그때의 제일고보에 영어선생으로 취직해 해방 때까지 10여년을 근무하였다. 그가 가르친 학생 중에는 학계·정계·재계에 유명한 사람이 많았다. 대통령을 지낸 최규하, 국무총리를 지낸 박충훈이 다 그에게서 영어를 배운 사람이었고, 그들은 학생 때에 영어성적이 우수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사법대학 학장을 지냈고, 사변 후에는 고려대학교로 옮겨 대학원장을 지내고 정년퇴직 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내노라하고 활약하는 사람 외에 최근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백남준도 학생 때에는 장난꾸러기로 유명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오랜 경험으로 본다면 성실하고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은 대부분 기껏해야 대학교수에 그치는데, 학생 때부터 탈선적이던 사람이 나중에 대성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종수는 이광수와 주요한의 측근으로 젊었을 때 흥사단 기관지인 잡지 「동광」의 편집을 맡아보기도 하였고, 조선일보 기사노릇도 하였다. 그 뒤 교육계에 들어가 사법대학 학장, 교육대학원장 등을 지낸 뒤 퇴직했다.
이재학은 유진오와 제일고보 당시부터 동창인 사이여서 대학 때에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대학을 나온 뒤 일본에 건너가 작가로 나서려고 하였으나 뜻대로되지 않았다. 해방 후에는 강원도 홍천에서 출마하여 자유당의 중진으로 활약하였고, 자유당 말기에는 이기붕의 측근으로 국회 부의장까지 지냈다. 4·19를 지내고 옥고를 치렀지만, 그는 정치가답게 권모나 술수를 쓸 줄 모르는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이었다.
노영창은 월탄 박종화의 매부였는데, 졸업한 뒤 영문과 초대 조수(지금의 조교)로 있다가 일본 나라에 있는 천리교에서 경영하는 천리외국어학교 교수로 갔었다. 거기서 병을 얻어 서울에 돌아온 후 죽었다.
끝으로 박충집은 서울문리대에서 영문학을 오랫동안 강의하다가 정년퇴직 하였다.
이상으로 우리 반으로부터 시작해서 제1회 졸업생까지를 훑어보았는데 일제시대에는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영어선생이었고, 해방 후에는 영문학 교수가 되어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열여섯 사람 중 대부분이 죽었고 다섯밖에 남은 사람이 없다. 최×서·현×섭 같은 명물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성실한 학자들이었다.

<고침>경성제대 영문과의 「플라이스」선생은 「블라이스」선생의 잘못이었기에 바로 잡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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