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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정치혼란의 대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필리핀의 정치적 불안은 이제 위험수위에 육박한 느낌이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반정부 세력의 시위가 계속되고 사상군가 속출되는 가운데 대규모의 예금인출 사태가 벌어지고, 결국은 지준금 부족이라는 이유로 유력은행이 예금지출을 거부하고 문을 닫았다.
예금자들이 대거 은행으로 몰려들자 불안을 느낀 은행당국은 군부에 지원을 요청, 무장 군인들이 은행문을 지키고 있다.
정부가 있으나 위기관리 기능을 상실한 듯한 느낌조차 줄 정도다.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우리와는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에서 전우관계를 맺어온 전통적 우방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염려스러운 일이다.
오늘의 이 모든 상황은 부패·무능한 소수인의 장기집권과 족벌체제의 결과다.
필리핀의 비극은 65년에 당선되고 69년에 재선된 「마르코스」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해 72년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시작됐다.
신사회 건설이라는 명분아래 계엄통치를 시작한 그는 먼저 야당과 언론·학생층의 반정부인사를 검거, 투옥하고 헌법을 두 차례나 고쳐 통치권을 강화했다.
4년 임기가 끝나가던 73년 7월에는 대통령유임을 결정했고, 77년에는 「마르코스」자신이 수상마저 겸임한 다음 부인 「이멜다」여사를 마닐라 수도권의 지사 및 거주 환경상을 경직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비정이 계속됨에 따라 인플레와 실업이 증가하고 여당에서는 내분이 일기 시작했다.
반정부 세력의 시위와 공산계인 신인민군 및 민다나오섬의 분리주의 모로 민족해방전선의 반란은 더욱 가열됐다.
이런 사회불안은 83년8월 「마르코스」의 최대정적인 「아키노」 전상원 의원이 귀국도중 살해됨으로써 한층 고조돼 왔다.
79년에 국민들의 반대에 부닥쳐 계엄령은 해제됐지만 보안경찰엔 과열시위대에 대한 발포권을 주어 데모군중과 경찰이 충돌할 때마다 피살자가 생기고 있다.
특히 최근 「마르코스」의 건강악화설 속에 군부에 의한 쿠데타 기도설조차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이런 모든 불길한 징후들이 정치와 경제의 악순환을 몰고왔다.
원래 필리핀은 은행의 자유허가제를 실시하여 그 수가 많을 뿐 아니라 경영 부실로 인한 파산이 많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경우 필리핀 최대 민간은행이 문을 닫았고 그것이 정치불안에 기인한 것이며 이런현상이 다른 군소은행으로 파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귀추가 심상치 않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필리핀의 운명은 그런 점에서 중요한 교훈이 된다.
우리는 지방인 필리핀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마르코스」대통령의 과감한 영단을 기대한다.
그것은 권력층에 대한 부정·부패의 척결, 민주질서의 회복, 권력의 배타적 독점지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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