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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1000원 택시 탄 어르신 읍내서 ‘번개’ 친다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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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어, 오후 버스 들어왔네. 뭘 그렇게 많이 샀어?” “주말에 손주들 온다고 해서 시장에서 고기하고 과자 좀 샀지. 하하.”

 지난달 29일 경북 예천군 용궁면 성저마을. 마을회관 정류장에 25인승 중형버스가 멈춰 서자 조용했던 마을이 한 순간 왁자지껄해졌다. 반나절만 못 봐도 안부가 궁금한 이웃사촌 간에 반가운 인사가 오갔다. 지난해 12월부터 오전 9시와 오후 2시, 하루 두 차례 성저마을과 면소재지(읍부리)를 이어주는 마을버스가 다니면서 생긴 변화다. 예천군이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촌형 교통모델 사업지역으로 선정되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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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명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인 이곳은 그 전까지 버스가 들어오지 않았다. 대형버스가 들어오기에는 1.7㎞ 거리의 왕복 1차선 마을 진입로가 너무 좁아서였다. 이 때문에 대부분이 70대 이상인 마을 주민들은 면소재지나 읍내에 나가려면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로변까지 30~40분을 걸어나가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농촌형 교통사업 모델 사업 선정으로 좁은 도로를 다닐 수 있는 중형버스가 배치되면서 걱정이 사라졌다. 마을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이인철(75)씨는 “장을 보거나 병원에 가는 것은 물론 단체 나들이가 훨씬 수월해졌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오후 경북 예천군 용궁면 성저마을(향석2리) 마을회관 앞에 도착한 25인승 중형버스.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 산골마을에 버스나 택시를 지원해주는 농촌형 교통모델 사업이 주목 받고 있다. 농촌 주민의 이동을 돕는 복지 서비스를 넘어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촉매로도 작용하고 있다. 이 사업은 2013년 ▶충북 옥천 ▶충남 서천 등의 자체 시범 사업을 거쳐 지난해부터 농식품부가 전국 단위 규모로 확대했다. 인구가 줄어드는 농촌 마을을 적자 노선으로 분류해 버스 운행을 중단하는 사례가 갈수록 늘어서였다. 실제 통계청의 2010년 농림어업 총조사에 따르면 전국 농촌마을(행정리) 3만6000곳 중 시내버스가 다니지 않은 지역은 3400곳(9%)이나 됐다. 안호근 농식품부 농촌정책국장은 “교통이 끊기면 농촌 고령자들은 의료·문화·경제적으로 총체적인 삶의 질 저하를 겪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한 맞춤형 교통 수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농식품부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공모를 통해 총 19개 시·군을 지원 대상으로 선정했다. 지난해는 ▶경북 예천군 ▶전남 무안군을 비롯한 12곳, 올해는 현재까지 ▶강원도 홍천 ▶경남 창녕을 포함해 7곳에 농촌형 교통모델 사업이 시행되고 있다. 이 사업의 혜택을 보는 주민 수만 5만5000명이다. 차종은 기존의 시내버스인 대형버스 대신 택시나 12~15인승 승합차, 또는 25인승 중형버스로 정했다. 왕복 1차선이나 좁은 농로를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대신 지자체가 지역 사정에 맞춰 모델을 선택할 수 있다. 예컨대 유동인구가 많은 5일장을 기준으로 승객이 30명이 넘는 곳은 중형버스나 승합차, 승객 수가 30명보다 적으면 택시를 배차하는 게 보편적이다. 유동인구가 많더라도 길이 좁아 승합차가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은 택시를 운행한다. 요금은 지자체에 따라 적게는 100원, 많게는 2000원이지만 19개 지역 평균 1000원 가량으로 일반 시내버스와 비슷한 수준이다. 기본 요금만 받아 주민의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자는 취지에서다.

 농촌형 교통모델 운영비는 농식품부와 해당 지자체가 각각 반반씩 지원하고 있다. 올해는 지자체당 연간 1억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기본요금만으로는 버스회사나 택시사업자가 수익을 낼 수 없어서다. 사업자가 일단 요금을 받아 운행한 뒤 주유비·인건비와 같은 운영자금을 한달에 한번씩 지자체로부터 정산 받는 식이다. 운행방식을 살펴보면 중형버스·승합차는 전용기사가 있는 반면 택시는 개인이나 영업용 택시 2~3대가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움직인다. 마을 승객이 없을 때 택시가 다른 손님을 태울 수 있도록 사전 예약제로 운행하는 곳이 많다.

  택시는 보통 1~2명이 타다 보니 버스보다 기사와 마을 주민의 친밀도가 높다. 이는 29일 찾은 또 다른 사업 시행지역인 성주군 벽진면 중리마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민 51명이 사는 이곳은 지난해 농촌형 교통모델 사업지역으로 선정된 뒤 이름 붙인 ‘별고을 택시’가 하루 8차례 들어오고 있다. 이전까지는 면사무소가 있는 수촌리까지 가려면 버스 정류장까지 30분 이상을 걸어나가야 했다. 그마저도 하루에 두 번 밖에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3대가 함께 사는 김말년(75) 씨는 “예전엔 허리·무릎이 아파도 병원에 자주 가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전화 한 통화면 500원에 택시 타고 편하게 병원에 간다. 손자 등교시간도 훨씬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택시기사 도창선(59) 씨는 “원래는 정해진 시간에만 가기로 돼 있지만 마을 주민과 정이 생겨 밤 늦게 불러도 갈 때가 있다”며 웃음지었다. 성주군청 경제교통과 배성대 씨는 “처음엔 어르신들이 콜택시 부르는 걸 쑥쓰러워 했지만 지금은 익숙해져서 이용률이 무척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농촌형 교통모델은 기존 대중교통 노선과 달리 노인층 승객이 많은 점을 고려해 관공서·의료기관·목욕탕·관광지·금융기관과 같은 복지·문화시설과 같은 곳에 정거장을 설치했다. 농촌 주민 맞춤형 정거장이라 할 수 있다. 충남발전연구원이 지난해 이 사업을 모니터링한 결과 사업 시행 이후 주민들의 외출횟수는 월 평균 3.2회에서 6.5회로 배 이상으로 늘었다. 교통서비스 만족도 역시 운행 전 41.7점에서 운행 뒤 88.6점으로 배 이상 높아졌다.

 주민들이 면소재지나 읍내에 자주 나와 물건을 사고 농산물을 내놓으면서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가 커지고 있다. 예전에는 5일장이 열려도 면소재지로 나오는 시골 주민이 별로 없었다. 고령층이 대부분이라 1㎞ 이상 거리의 버스정류장까지 걸어 다니기 어려웠다. 왕복 1만5000~2만원 하는 택시를 부르는 것도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웠다. 한 달에 한두 번 진짜 필요할 때만 면소재지에 나오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저렴한 요금(500~1000원)에 일주일에 두세 번 택시를 타고 나와 장을 보고 병원에 간다. 전북 고창군의 마을택시 운행 담당자인 신동원 씨는 “어르신들이 면소재지 뿐만 아니라 버스를 환승해 고창읍까지 나오는 경우가 늘었다. 마을택시가 고창군 경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25개 마을에서 농촌형 교통모델 사업을 시행중인 성주군도 5일장이 열리는 날 유동인구가 예전보다 크게 늘었다. 성주군 벽진면 중리마을의 도정호(81) 씨는 “매일 택시 타고 복지회관에 가다 보니 맛집을 찾아 가고 장도 봐서 집에 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북 완주군은 농촌형 교통모델을 로컬푸드버스로 활용해 경제효과를 높이고 있다. 농민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버스로 로컬푸드 직매장까지 실어주기 때문에 트럭을 이용하는 것보다 운송비가 훨씬 적게 든다. 농식품부의 안호근 국장은 “농촌 주민이 읍·면 소재지의 의료시설·시장·학교와 같은 시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교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복지정책이자 지역경제 활성화 대책”이라며 “앞으로 농촌형 교통모델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더 많은 시골 마을 주민들이 혜택을 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예천·성주=이태경 기자 uni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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