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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숙의 ‘新 名品流轉’] 권력따라 돌고 돈 조선백자의 명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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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호 29면

김상엽(52)씨는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으로 일하는 미술사학자다. 근대 미술 시장사(市場史)에 관심이 많다. 그가 올초 출간한 『한국 미술시장사 자료집』(경인문화사)은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간행된 각종 경매 일람과 전시 도록 등 미술시장 관련 자료 70여 종을 모은 6권짜리 영인본으로, 이 분야의 알뜰한 기초 자료라는 평가를 받았다. 흔히 골동(骨董)이라 불리는 고미술품이 돈과 권력을 좇는다는 실증이 이 자료집에 그득하다.

김 위원이 최근 펴낸 『미술품 컬렉터들』 (돌베개)은 이 자료집에 등장하는 주요 근대 수장가와 그 수집의 문화사를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룬 10여 명 근대 수장가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이가 창랑(滄浪) 장택상(1893~1969)이다. 창랑은 친일파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국무총리에 올랐다가 야당 지도자로 마감한 풍운의 정객으로 ‘정치의 곡예사’라 불리기도 한다. 그는 가문의 재력과 자신의 권력을 바탕으로 풍류와 예술을 즐기며 당대 손꼽히는 고미술품 수집가가 되었다. “로맨스는 인생이요, 인생은 로맨스다”를 지론 삼아 경성 한복판 수표동 자신의 집을 호사가 컬렉터들의 사교장으로 만들었다. 그의 집이 ‘장택상 살롱’이라 불렸던 이유다.

창랑은 수도경찰청장 시절, 메다마(目玉)란 별명으로 더 이름났던 골동 거간꾼 한영호, 호랑이란 별칭이 붙었던 유용식 등을 거느리고 일본인이 놓고 간 고미술품을 긁어모았다. 이때 도자기 수집의 권위자라 불리던 그의 손에 들어간 명품이 백자 철사(鐵砂) 포도문 항아리다. 이 항아리를 소유하고 있던 골동상 권씨가 일본인 소유물을 불법 거래했다는 죄목으로 잡혀 들어간 사이 포기각서를 받고 양도받은 것이다. 권씨는 옥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울화병으로 타계했다.

이 포도문 항아리는 1950년대 후반 선거를 치르느라 돈이 필요했던 창랑이 ‘필승각 박물관’ 건립에 심혈을 기울이던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에게 당시 돈 1600만환에 양도함으로써 안식처를 찾았다. 1960년 12월 이 백자 항아리는 국보 제107호로 지정되면서 이대 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이 됐다. 어른 팔 한 아름이 되는 듬직하고 의젓한 자태에 윗부분에 탐스런 포도송이가 달린 사실적인 포도덩굴을 그려넣었다. 당당한 형태, 대담한 구도에 여백을 남기며 그린 문인화풍의 포도 그림이 잘 어우러져 18세기 영·정조 시대의 문화융성을 보여주는 조선백자 3대 명품의 하나가 되었다.

제3공화국 때 창랑 못지않은 권력자였던 L씨, P씨, J씨 등이 관련된 고미술품 이야기는 언제쯤 공개될 수 있을까. 김 위원은 이렇게 요약했다. “일부 근대 수장가들의 천박하고 저열한 민낯과 현대 수장가들의 수장 행위가 얼마나 차별성을 갖는가 또한 치밀하게 분석해야 할 부분이다.”

정재숙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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